암흑기의 세상 속 시노드의 작은 빛
Andrea Tornielli
불길에 휩싸인 세상, 새로운 세계 분쟁의 심연에 직면한 세상, 경청할 줄 모르는 세상, 온라인을 통해 전쟁과 폭력을 조장하는 혐오가 판치는 세상에서 400명의 사람들이 한 달 동안 집을 떠나 기도하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토론하려고 모였다는 것은 분명 뉴스 가치가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날 강조하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는 양극화를 극복하고, 널리 공유된 합의에 이르기 위해 자기 중심적 생각을 내려놓고 서로를 맞아들이며 대화하는 게 여전히 가능하다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상징한다. 우리는 민간인과 어린이를 대량 학살하고 언어 폭력과 독단적 사고를 빌미로 유지되는 전쟁과 테러의 시대, 소위 암흑기를 살고 있다. “평화”, “대화”, “협상”, “휴전”마저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단어가 되어버린 암흑의 시간, 정부와 지배계급을 비롯해 모든 계층에서 용기, 선견지명, 외교적 창의성이 결여된 암울한 시간이다. 이럴 때일수록 참으로 기도에 매달려야 하고, 우리의 이해관계와 이념, 당파성을 뛰어넘는 예언자적 목소리, 곧 로마의 주교(교황)의 목소리를 지지하고 따라야 한다. 불길에 휩싸인 세상에서 이번 10월에 열린 세계주교시노드는 교회와 온 인류의 미래를 위한 작은 씨앗이 되길 희망한다.
1년 후 폐막하게 될 이번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1회기에서 매우 높은 비율의 찬성으로 의결된 종합 보고서를 분석해 보면, 교회와 교회의 사명과 관련해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의 고유한 부르심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적용해야 할 필요성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됐다. 복음서를 보면 모든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시고 모든 이와 대화를 나누셨던 예수님께서는 특권계급, 곧 다른 이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는 데 익숙했던 당시의 성직자들, 바리사이, 율법학자의 반대를 받으시며 그들과 맞서 싸우셨다. 교황청에서 가장 작은 본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의 교회에서 모든 직무는 권력이 아니라 봉사라는 인식을 회복하기 위해 예수님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고, 일치를 이루고, 공동 책임을 지게 하고, 형제애를 구현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하고, 거리를 두지 않고, 특권을 강화하지 않고, 성직자와 비성직자를 구분하지 않고, 세례 받은 평신도를 (아마도 말보다 행동으로) 이류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진정 “섬기는” 교회가 될 것이다. 동시에, 사제 성소에 부름받지 못했지만 세례성사의 특별한 사제직 안에서 다른 형태의 증거와 봉사에 부름받은 세례 받은 이들이 “헌신적 평신도”라는 특권을 떨쳐 버리기 위해 스스로를 성직화하고 스스로 성직화되길 원하는 위험을 피하는 것도 필요하다. 로마에 모인 남성들(대부분이 남성, 그리고 그 대부분이 주교들)과 여성들이 체험한 은총의 시간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 전반에 인내심을 가지고 적용될 수 있는 방법으로 증거된다면, 이번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세계주교시노드는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관료주의적 성과로 축소되거나, 과거에 성직자 범주와 혼합된 “교회적인 것”들과 자기 중심적 언어의 믹서기에 집어넣어 버린다면 희망의 씨앗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말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적용하길 원한다면서 실상은 결정권을 가진 주교와 사제, 그리고 그 결정을 실천에 옮기는 데 한계가 있는 세례 받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기존의 관행과 공의회 이전 범주에 따라 행동하는 교회가 될 뿐이다.
이제 막 발표된 종합 보고서는 여성, 여성의 천부적 재능,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마리아 원리에 더 많은 자리를 할애해야 할 공동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경우에도 복음을 더 바라보고 예수님을 더 신뢰하는 용기가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요한을 제외하고)이 도망쳤을 때, 십자가 아래에는 여인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그들은 남아 있었다. 무덤을 떠난 그 여성들의 직관과 용기 덕분에 우리는 부활의 첫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빈 무덤에는 겁에 질려 문을 닫아 걸고 있던 사도들, 곧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먼저 있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이 운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소식을 최초로 전한 사람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빈 무덤을 증언하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렸다. 그들은 성금요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여전히 겁에 질려 있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우리 신앙의 본질인 케리그마(kerygma)를 처음으로 전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고질병, 베드로의 후계자(교황)가 반복적으로 비난하는 성직자 중심주의의 참상을 극복하고 교회의 모든 차원에서 여성을 훨씬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점을 우리 모두가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시노드 종합 보고서가 이 분야에서도 복음의 근원을 회복하는 데 있어 중요한 지점이 되길 바란다.
시노드 총회 대의원들이 승인한 보고서에서 드러난 또 다른 요소는 상처 입은 이들에 대한 환대다.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고 – 가난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사회학적 범주나 해방신학의 발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교부들의 전통적 가르침이다 – 이주민을 환대하는 데서 그리스도인은 피난 중에 있는 나자렛 성가정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불법체류자들”,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 “볼품없는” 이들을 환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번 우리는 복음으로 돌아가서, 교황이 리스본 세계청년대회에서 교회에는 진정 “모든 이, 모든 이,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있다고 반복한 매우 효과적인 요점을 담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서의 모든 페이지마다 우리는 죄인들, 상처 입은 이들, 버림받은 이들, 불법체류자들, 부패한 이들,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 “우리 편”이 아닌 이들을 포용하기 위해 금기와 기존 전통을 깨뜨리시고, 순응주의와 위선을 무너뜨리시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사건이 있기 며칠 전인 서기 30년 3월 예리코의 돌무화과나무 아래를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모든 이에게 미움을 받던 부패한 세리를 올려다보시며 그의 집에 머무르시겠다던 역동성으로 돌아간다면 우리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다. 자캐오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환대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심한다. 이 회심은 자신을 바라보는 예수님 사랑의 눈길을 먼저 느끼고, 예수님께 먼저 환대를 받고, 예수님께서 먼저 자비를 베푸신 결과다. 회심이 필수 전제조건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이를 그들의 비참과 죄와 함께 예수님과 같은 눈길로 바라보면서 그들로 하여금 환대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것, 인내와 온유한 사랑으로 동행할 수 있는 교회다. 이는 하느님의 시간과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은총의 역사와 그 활동을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끝으로 시노드 종합 보고서가 교회법을 재검토하고, 더 큰 확신과 구체성으로 교회 일치 운동의 길에 끊임없이 나서며, 이미 존재하는 시노드 구조를 더욱 많이 활용하도록 요구하는 점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지난 1995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교황 직무와 관련해 “사명에 대한 본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상황에 개방적인 수위권 행사 방식을 강구하라”(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고 지적한 길로 들어서는 것도 언급해야 한다.
번역 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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