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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기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하느님께 매일 자신을 맡기는 기도입니다”

지난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의 삼종기도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매일 아침 다음과 같이 기도하자고 초대했다. “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오늘 주님의 뜻이 제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께 기도를 바친 다음, (전날 밤 나이트클럽 압사사고로 사상자가 발생한) 코리날도의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청했으며, 19명의 알제리 순교자들의 시복이 “형제애와 연대의 세상을 다 함께 건설하는 데 자극이 된다”고 말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양자택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는 처음부터 하느님께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오고, 복음에는 잉태예고에서 하느님께 ‘네’라고 말하는 마리아가 나옵니다. 두 경우 모두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고 계십니다. 하지만 첫 번째 경우에는, 죄를 지은 다음 (숨어버린) 아담을 찾으시며 (그에게)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고 물으시자, 그는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두 번째 경우에는 죄 없는 마리아를 찾아가셨는데, 그녀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라고 대답했습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Eccomi)!’는 ‘두려워 숨었습니다’(라는 태도)와는 정반대됩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는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것이고, 반면에 죄는 (스스로를) 가두고 고립시키며 자기 자신을 홀로 남겨둡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키워드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에만 집중했던 수평적인 삶으로부터, 하느님을 향해 투신하는 수직적인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표시해줍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기주의에 대한 치료이며, 항상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불만족스러운 삶에 대한 예방책입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습관화된 죄에서 벗어나는 수단이고, 내면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치료입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욱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거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요, 그분의 놀라우심에 온순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바칠 수 있는 가장 큰 찬미입니다. 하루를 “저 여기 있습니다, 주님!”으로 시작하지 않으시렵니까? 매일 아침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오늘 주님의 뜻이 제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삼종기도에서 이 구절을 기도로 바치겠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다 함께 기도합시다. “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오늘 주님의 뜻이 제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Eccomi, Signore, oggi si compia in me la tua volontà)!”

마리아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Avvenga per me secondo la tua parola)”라고 덧붙였습니다. “제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분께 조금만 헌신하고, (나의 일을) 서둘러 처리하고, 그런 다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지”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갑자기, 마음 내킬 때,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위해서,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모님 삶의 비결이었습니다.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신뢰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담처럼 그분께 “저는 두려워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할 때 고통스러워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시고, (세상의) 아버지들보다 가장 따뜻한 사랑을 지니신 분이시며, 자녀들의 신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분을 의심하고, 그분을 의심합니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어떤 시련을 주신다고, 우리에게서 자유를 박탈하신다고, 우리를 저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큰 속임수입니다. 태초의 유혹이자 악마의 유혹입니다. 곧, 하느님을 불신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러한 첫 번째 유혹을 당신의 ‘저 여기 있습니다!’로 이겨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죄 없이 잉태되어 살아가셨으며 하느님께 늘 온순하셨고 투명하셨던 성모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봅시다.

마리아의 삶이 순탄했다고 말씀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지낸다고 해서 (삶의) 문제들이 마법처럼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떠올려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38절). 멀리 떠나갔습니다. 아주 강한 어조의 동사입니다. 천사는 동정녀를 어려운 상황 속에 홀로 남겨둡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특별한 방식으로 알아챘지만(천사가 이를 말해주었습니다), 천사는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지 않았고, 오직 마리아에게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즉시 문제들이 시작됐습니다. 율법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을, 성 요셉의 고통을, 갑작스러운 삶의 계획을,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했는지를 (...) 생각해봅시다. 그러나 마리아는 문제들 앞에서 하느님께 신뢰를 두었습니다. (비록) 천사는 그녀를 떠났지만, 그녀와 함께, 그녀 안에, 하느님께서 남아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신뢰했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비록 예기치 않은 방법이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잘 되어가리라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문제들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한 가지 문제가 끝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매일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Eccomi)!” “저 여기 있습니다!”는 (우리가 해야 할) 말입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는 기도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마리아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합시다.

08 12월 2018, 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