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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돔 미사 강론 “경쟁과 이윤을 극복하며 항상 생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월 25일 도쿄돔에서 미사를 거행했다. 교황은 모든 대가를 치르고 성공을 좇아가는 데 있어서 스스로 고립되거나 함정에 빠지지 말라면서, 우리 일상의 선택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초대했다.

번역 이창욱

방금 들었던 복음은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이는 우리가 “산상설교”로 알고 있는 것이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초대받은 길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알리시는 장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에게 올라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탈출 24,1 참조). 산의 정상은 자신의 의지나 출세주의를 통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여정의 모든 교차로 한가운데에서 스승님의 말씀에 주의 깊게, 그리고 인내를 갖고, 세심히 경청하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정상은 성부의 연민을 중심으로,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전망을 선사하기 위해 평원으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의 절정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희망과 기대를 넘어서는 충만함으로 이끄시는 방식을 보여주십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발견합니다. 그 생명 안에서 우리가 사랑 받고 있는 자녀임을 아는 자유를 체험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길을 걸어가는 중에 하느님 자녀로서 누릴 자유가 억압되고 약화된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불안과 경쟁의 악순환에 갇혀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누구이며 또 우리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정의를 내리면서, 우리가 분주하게 결과물에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할 때,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확인하고 측정하기 위한 유일한 기준으로 소비주의를 택할 때 말입니다. 이 같은 척도는 조금씩 우리로 하여금 중요한 것에 대해 무감각하고 영향 받지 않게 만듭니다. (오히려) 무의미하고 일회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헐떡거리도록 부추깁니다. 모든 것을 만들 수 있고,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열렬히 믿음으로써, 영혼은 얼마나 억압받고 구속되는지요!

이곳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잘 발전된 사회에서, 오늘 아침 제가 만난 젊은이는 저에게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자기 존재와 삶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소외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돕는 장소가 돼야 할 집, 학교, 사회 공동체는 이윤과 효율을 추구하는 과도한 경쟁 때문에 갈수록 무너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란과 불안을 느낍니다. 그들은 평화와 안정을 앗아가는 지나친 요구와 걱정으로 압도당합니다.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며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치유의 향기처럼 울려 퍼집니다. 세 차례나 끈기 있게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31.34 참조). 이 말씀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무시하라거나 혹은 우리의 일상적인 일과 의무에 대해 무책임하라는 초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우선순위를 더 넓은 의미의 지평을 향해 열고, 같은 방향 안에서 바라보기 위한 공간을 조성하라는 도발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주님께서는 음식이나 의복과 같은 생활필수품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을 희생해서라도, 모든 대가를 치르고 성공을 좇아가는 데 있어서 스스로 고립되거나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우리 일상의 선택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윤이나 이익만 좇는 세속적인 태도와, 개인의 행복만 고집하는 이기주의는, 사실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노예로 전락시킬 뿐 아니라, 참으로 조화롭고 인간적인 사회의 발전을 저해합니다.

소외되고, 고립되고, 심지어 숨막히는 “나”에 반대되는 것은 오직 함께 나누고, 기념하며, 친교하는 “우리”일 뿐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 2019.2.13. 참조). 주님의 이러한 초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떠올립니다. “우리 삶이 근본적으로 선물임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자유가 은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날 혼자 힘으로 무언가를 소유할 수 있고 이것이 자신의 독창성과 자유의 결실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55항). 이 때문에 제1독서에서 성경은 생명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우리의 세상이 제일 먼저 우리를 앞서시는 창조주의 놀라운 선물임을 상기시켜줍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하느님께서는 좋은 것과 아름다움을 선사해주시고, 이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나누고 서로에게 내어 줄 수 있습니다. 주인이나 소유주가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께서 꿈꾸시는 것과 동일한 꿈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우리 자신의 삶과 자연과 맺은 관계를 올바로 돌보는 것은 형제애, 정의, 다른 이에 대한 충실함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70항).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모든 생명을 보호하고, 무상성과 연민 그리고 관대함과 단순한 경청으로 특징되는 (삶의) 스타일과 “모든 약함과 결함, 많은 경우 자신의 모든 모순과 의미 상실”(세계청년대회 밤샘기도 연설, 파나마, 2019.1.26.)로 점철되어 다가오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는 (삶의) 스타일을 증거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형제들을 환대할 수 있는 교육을 발전시키는 공동체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완벽하거나 순수하거나 ‘정제된’ 것만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애가 있거나 허약한 사람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습니까? (...) 외국인이 된 사람, 실수를 한 사람, 아프거나 감옥에 있는 사람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센병 환자, 시각 장애인, 중풍병자, 바리사이, 죄인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도 죄수를 받아들이셨고, 심지어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도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셨습니다”(세계청년대회 밤샘기도 연설, 파나마, 2019.1.26.).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공동체로서, 상처받은 이들을 치료하고 화해와 용서의 여정을 언제나 선사하기 위해 준비된 ‘야전병원’이 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며 우리를 재촉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을 판단하는 유일한 척도란 당신의 모든 자녀를 위해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연민이라는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일치하면, 선한 의지를 지닌 모든 사람뿐 아니라 다른 믿음을 가진 종교인들과도 항상 협력하고 대화하면서, 모든 생명을 돌보고 보살피는 사회의 예언자적인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

도쿄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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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1월 2019, 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