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번역 김단희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로마의 교구장으로 선출된 지 8개월 만인 지난 2013년 11월 「복음의 기쁨」을 반포했다. 「복음의 기쁨」을 통해 교황은 우리의 모든 행동, 성찰, 교회 사업을 “현대 사회 복음의 선포”라는 주제에 맞춰 수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복음의 기쁨」 반포 이후 6년이 지난 지금, 교황은 올해 10월을 ‘특별 전교의 달’로 지정하는 한편, ‘범아마존 지역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특별 회의(이하 아마존 시노드)’를 개최하고 “(지구의) 녹색 허파”인 아마존 지역을 위한 복음 선포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아마존 지역은 그곳에 사는 “우리 형제자매들과 우리 자매인 땅”을 상처 입히고 훼손하는 약탈적 착취 행위로 ‘순교’의 고통을 겪고 있다(아마존 시노드 폐막미사 교황 강론 참고).
이 기간 중 발표된 교황 연설은 세상 안에서 교회가 맡은 사명의 구체적인 본질에 관한 내용이 자주 언급됐다. 예컨대 교황은 복음화가 “개종”을 의미하지 않으며, 교회는 “매력”과 “증거”로 성장한다고 강조해왔다. 교황은 이를 통해 사목적 사업의 역동성을 설명하고 그 기원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했다.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 현대 사회 선교사의 의미에 관한 대담』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는 새 책에는 이 밖에도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다. 교황청 산하 통신사 「피데스」(Fides)는 책 출간에 앞서 그 내용을 간략하게 공개했다.
교황님께서는 젊은 시절 선교사로서 일본에 가고 싶어하셨습니다. 교황님은 결국 선교사가 되지 못했다고 봐야 하는 걸까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항상 국경을 넘나들며 선교 소명을 실천하는 예수회 사제들의 모습에 감명받아 예수회에 입회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만,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는 어떤 외향적 태도,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늘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교회”를 강조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올바른 모습이 무엇인지 강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을 사용하다 보니 때로는 진부한 구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교회’라는 말은 제가 만든 세련된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교회는 결국 부패하고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립니다.”
움직이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교회는 어떻게 되는지요?
“그런 교회는 윤리적∙종교적 사업 및 메시지 전달에 몰두하는 다국적 ‘영성 단체’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 자체로는 물론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만, 그런 단체를 교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 고정적인 위치를 확보한 모든 단체가 이 같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길들이려’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사는 대신 자기가 좋을 대로 적당히 편집하고 ‘길들인’ 특정한 말씀만을 대변하려 합니다. 지시만을 따르고, 이미 결정된 계획대로만 일이 진행되는 곳에서 우리는 교회 생활의 ‘작은 관리자’를 자청해 모든 일을 조직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맨 처음에 우리 마음을 울렸던 그런 만남은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선교가 이 모든 것의 ‘해독제’가 될 수 있을까요? 선교 사명을 위해 “밖으로 나아가는” 노력과 의지로 이 모든 왜곡을 피할 수 있을까요?
“선교 사명도, ‘앞으로 나아가는 교회’도 단순히 의지력 하나만으로 진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로 하여금 밖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밀어주시고 움직이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화의 사명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그분께서 먼저 오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계십니다. 그분께서 이미 우리가 갈 길을 마련해 놓고 헌신하고 계십니다.”
교황님께서는 교황청 전교기구로 하여금 사도행전을 읽고 꾸준히 기도하도록 권고하신 바 있습니다. “현대적” 선교전략을 제시하는 대신 초기 선교 시대를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사도들이 아닙니다. 성령이 주인공이십니다. 사도들은 성령을 알아보고 성령을 증거한 최초의 인물들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통해 합의된 바를 보고하기 위해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한 편지에는 ‘성령과 우리는 (…)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8)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은 이들’을 보태준 것이 인간의 설교가 아니라 주님이셨음을 분명히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거 그때와 지금이 같은가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지요?
“사도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어떤 강요도 없이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은 늘 뒤에, 성령께서 임하신 뒤에 도착합니다. 성령께서 먼저 준비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계획을 망가뜨리는 것도 그분입니다. 성령께서 사도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상황에서 그들을 안내하고 위로하십니다. 곤경과 박해가 발생할 때면 성령께서 임하시어 놀라운 방식으로 위로와 위안을 주십니다. 최초의 그리스도교 순교자 성 스테파노의 경우에도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나요?
“이후 박해가 시작됐고 사도들을 제외한 많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돼 흩어진 그들은 사도들도 없이 외톨이였지만 주변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받은 그들에게 성령께서 ‘사도적 용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선교사의 조건이 세례성사 하나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선교는 그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강력하게 주장하거나 선동할 필요 없습니다. 체계를 갖추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으며, 어떠한 수법도 책략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오늘날 우리에게도 ‘성령과 우리는 결정하였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을 허락해 달라고 그분께 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한 경험이 없는 선교 소명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성령 없이 행하는 선교는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런 선교는 정복 계획이며, 그저 무엇인가를 정복하려는 구실일 따름입니다. 이 종교적 혹은 이념적 정복 행위는 선한 의도로 행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교’가 아닙니다.”
교황님께서는 자주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의 말씀을 인용해 교회가 ‘매력’으로 성장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인지요? 누가 누구를 이끌어 들인다는 말씀이신가요?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 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과 복음 가까이로 우리를 이끄는 자극의 바람직한 형태가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떤 확신도 합리적 설명도 아닙니다. 입장을 취하는 태도도, 압력이나 통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매력’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예레 20,7)라고 고백합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은 사도들, 선교사들 그리고 그들의 사명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밖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말씀입니다. 이는 사랑에 빠지는 것, ‘매력’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스스로의 능동적 결단이나, 책상에 앉아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거나 선교사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매력’ 안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에게로 스며드는 선교적 추진력만이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 매력이 선교와 복음 선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께 이끌려, 그 매력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한다면 다른 이들도 쉽게 이를 알아챌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를 증명할 필요도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선교의 주인공 혹은 관리자라고 여기는 이들은 오히려, 가장 훌륭한 의도와 목적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이끌어 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복음의 기쁨」에서 교황님께서는 이 모든 것 때문에 “우리는 갈피를 못 잡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심연에 빠져 무엇을 찾을지 알지 못하는 이들과 같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하신 메시지가 무엇인지요? 이 또한 선교와 관련이 있나요?
“선교는 이미 여러 번 시험하고 검증된 기업의 계획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훌륭한 마케팅 덕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대중에게 자랑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뜻하시는 때에, 뜻하시는 곳에 임하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신비가 ‘현기증’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통제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성령께 스스로를 내어놓을 때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부활의 신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다정한 품 안에서 편히 쉬는 법을 배우신 그리스도의 예를 본받는 태도입니다. 선교의 신비로운 결실은 우리의 의도, 방식, 열망, 계획 안에 있지 않으며,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느끼는 이 ‘현기증’ 안에 존재합니다.”
교황님께서는 또 교회가 “증거”를 통해 성장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인지요?
“앞서 말씀 드린 이 ‘매력’이 우리로 하여금 증거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을 우리는 증거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사도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사도들을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증거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신비의 증거자들인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교회가 개종을 통해 성장하지 않으며, 선교가 개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셨습니다. 이 점을 강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다른 교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종교 간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의도이신지요?
“개종은 교회일치적 여정을 거스르며 종교 간 대화를 방해합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비를 향한 ‘매력’보다는 ‘현학적 담론’에 치중해 교회의 성장을 도모하고자 하는 계획에는 늘 ‘개종’이 끼어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한다지만, 개종은 선교 사업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시키는 태도입니다. 무해한 척 위장하고 있어도 개종은 본래 폭력적입니다. 은총의 힘으로, 자유와 친절을 통해 신앙은 전파됩니다. 하지만 개종에는 자유와 친절이 부재합니다. 개종은 과거 식민지 시대에나 통용되던 오래된 방식일 뿐 아니라, 물질적 이득으로 매수하거나 강요해서 얻어낸 회심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개종주의적 접근 방식은 교구, 지역 공동체, 신심단체, 수도회 내부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득력 있는 담론을 개발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의 선포는 ‘속삭임’만으로도 충분하며, 언제나 십자가 신비의 위력을 관통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의 길은 베드로 사도의 서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 세상의 눈에는 수치스럽고 어리석어 보이는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선교사”를 우리가 어떻게 식별할 수 있나요?
“참된 그리스도인 선교사는 신앙의 관리자가 아닌 ‘조력자’로 행동합니다. 이들은 모든 이를 품에 안고, 모든 이를 낫게 하며,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하신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장해물이 없도록 돕습니다. 조력자는 선별하지 않고, ‘사목적 관세’를 부과하지 않으며, 문 앞에 서서 누가 들어 올 수 있는 권리를 갖췄는지 감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세례성사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했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구 사제들과 공동체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사회적 상황을 포함한 다양한 이유로 세례를 받지 않는 이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은 세례성사란 어려운 일이 아니며, 누구든지 스스로를 위해 혹은 자녀들을 위해 요청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에 사제들과 공동체들은 한 가지 목표를 상정했습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자녀의 세례를 미루거나 포기하도록 하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정신적∙현실적 어려움을 제거하고, 모든 부담과 요구사항을 배제하겠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과거 복음화 초기 단계 선교사들 사이에서 누가 세례성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에 관한 논의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결론났나요?
“바오로 3세 교황께서는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이 선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론에 반대하시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세례성사를 도운 이들의 선택에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이제는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지금도 스스로를 ‘개명한 사람(enlightened)’으로 칭하는 이들의 무리나 집단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왜곡된 사고를 토대로 세상을 ‘문명’과 ‘야만’으로 분리하고 복음의 선포마저도 제한합니다. 주님께서 ‘검은 머리’(경멸적 표현)를 사랑하신다는 생각에 약이 올라 화를 냅니다. 이들은 또 인류의 상당수가 하위 계층에 속하며, 일정 수준 이상의 영적∙지적 생활을 영위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의 등급을 나누고 이류 인간을 상정해 경멸을 야기할 위험이 있습니다. 아마존 시노드 기간에도 이런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선교 사업에 있어서) 어떤 활동이 투명한 신앙의 고백인지 단순한 사회 사업인지 구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은 선교를 사회 운동 수준으로 축소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보시는지요?
“참행복(진복팔단)과 자비의 신비 테두리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활동은 선교와 일치를 이루며, 그 자체가 이미 ‘선포’이고 ‘선교’인 것입니다. 교회는 비정부기구(NGO)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교회도 야전 병원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환영 받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또한 교회의 선교 사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에 나서는 사람의 가슴 속에 있는 ‘사랑’입니다. 만약 한 선교사가, 모잠비크에서 자신이 세례를 주고 복음을 전한 주민들에게 우물이 필요해 공사에 협조한다면, 이 선교사의 행동이 복음화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다양한 사회문화적 맥락 가운데서 복음화의 결실을 맺기 위해 적용할만한 새로운 목표나 ‘감수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그리스도교는 단 하나의 문화만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참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복음 선포와 교회의 전통에 변함 없이 충실하면서도,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여지고 뿌리내리는 문화와 민족들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 40항)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과 공동체의 새로운 언어로 성령께서는 교회를 풍요롭게 하십니다. 이로써 다양한 문화의 가치를 받아들인 교회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패물로 단장한 신부(sponsa ornate monilibus suis)’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복음 말씀과 그리스도교 발전에 밀접히 연관돼 있는 문화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계시의 말씀이 특정 문화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새로운 문화와 만날 때, 특별히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문화와 만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복음과 함께 어떤 확고한 문화 형태를 강요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선교 사업은 ‘무거운 짐’을 지는 방식으로 행해서는 안됩니다.”
선교와 순교, 교황님께서는 선교와 순교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순교와 복음화는 동일한 기원 및 발단에서 비롯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부어 넣어주시면, 우리는 힘과 용기와 위안을 얻습니다. 순교는 그리스도께 바치는 증거와 고백을 최대로 드러내는 행위이며, 선교와 사도적 사업의 완수를 상징합니다. 저는 참수 당하는 순간에도 조용히 예수님을 불렀던 리비아 콥트정교회 형제들을 기억합니다. 예멘에 있는 장애인∙노인 복지시설에서 무슬림 환자들을 돌보다가 목숨을 잃은 마더 데레사 성녀의 ‘사랑의 선교수녀회’ 수녀님들을 기억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이분들께서는 수도복 위로 앞치마를 입고 계셨습니다. 이 형제자매들 모두는 ‘희생자’가 아닌 ‘승리자’입니다. 이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겪을 수 있는 순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양원에 계신 나이 많은 선교사들을 방문할 때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고단했던 삶의 흔적이 그분들의 모습에 역력히 드러납니다. 한 선교사가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이제는 기억을 잃어버려 과거에 자신이 한 좋은 일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잘 기억하고 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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