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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로마의 주교로서 여러분에게 건네야 할 메시지는 자비입니다”

3월 18일 오전, 교황청 사도궁 도서관에서 인터넷과 TV 생중계를 통해 진행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의 핵심은 다섯 번째 ‘참행복’인 자비에 대한 것이다. “우리 모두 용서와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자비의 비결은 용서하면서 용서받는 것입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다섯 번째 ‘참행복’에 대해 살펴봅시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이 다섯 번째 ‘참행복’에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행복의 원인과 열매가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바로, 자비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며, “자비로운”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용서의 상호성에 대한 이 주제는 다섯 번째 ‘참행복’에 있을 뿐 아니라, 복음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비는 하느님의 마음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항상 동일한 상호성입니다. 야고보서는 “자비는 항상 심판을 이긴다”(야고 2,13)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주님의 기도’는 더욱 그러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 이 청원은 마지막에 동일하게 다시 거론됩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15; 『가톨릭교회 교리서』, 2838항 참조).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과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는 일을 어려워하며,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자신이) 당한 해악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용서하는 일은 마치 매우 높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용서할 수 없어. 이건 용서가 안 돼’라고 생각합니다. 자비의 상호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혼자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이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사실, 다섯 번째 ‘참행복’이 우리에게 자비를 얻을 것이라고 약속한다면, ‘주님의 기도’는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합니다. 이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채무자이며, 자비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빚을 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습니다. 너무나 너그러우신 하느님에게, 형제들에게, 우리 모두는 채무자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마땅히 돼야 하는 아버지나 어머니, 남편이나 아내, 형제나 자매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빚(결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못했음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행해야 할 선에서 항상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이러한 빈곤이 용서할 힘이 됩니다! 우리는 채무자들입니다. 교리 교육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 것처럼 우리도 판단 받는다면(루카 6,38 참조), 판단을 자제하고, 부채를 탕감해주고, 용서해 주는 것이 우리에게 좋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해야 하고, 용서를 필요로 하고,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비결입니다. 이는 곧, 용서함으로써 용서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로마 5,8 참조).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면서 우리는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각자의 비참과 각자의 의로움의 결핍은 하늘나라를 향해, 더 큰 기준, 곧 자비이신 하느님이라는 기준을 향해 자신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우리의 자비는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아들일수록 더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842항 참조). 자비는 다른 여러 측면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입니다. 자비 없이 그리스도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1]. 만약 우리 그리스도교 전체가 우리를 자비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을 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비는 모든 영적 여정의 유일하고 진정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 중 하나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29항 참조).

이 주제는 제가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첫 번째 삼종기도 때부터 선택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바로 자비입니다. 이 주제는 제가 교황으로서 항상 전해줘야 하는 매일의 메시지로, 제 안에 강하게 각인돼 있었습니다. 바로 자비입니다. 그날 저는 발터 카스퍼 추기경님께서 갓 출판하신 자비에 관한 책을, 제가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는” 태도로 홍보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날 이것이야말로 로마의 주교로서 전해야 할 메시지라는 걸 아주 강하게 느꼈습니다. 바로 자비였습니다. 자비였습니다. 제발 용서하십시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구원이며 행복입니다. 우리는 자비 안에서 살고 있으며, 자비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비는 숨쉬는 공기입니다. 다른 조건을 내세우기에는 우리가 너무 보잘것없습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맙습니다!

 

[1]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 1980.11.30;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 2015.4.11; 프란치스코 교황, 교서 「자비와 비참」(Misericordia et misera), 2016.11.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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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3월 2020, 1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