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생존자 리디아 “교황님의 입맞춤이 제게 힘을 줬어요”
Salvatore Cernuzio / 번역 이재협 신부
“70072”. 이 숫자는 나치가 자행한 유다인 대학살의 생존자인 벨라루스 태생의 폴란드 여성 리디아 막시모비치(Lidia Maksymowicz)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돼 있을 때 문신으로 새겨진 수용자 번호다. 그녀는 5월 26일 수요 일반알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 소매를 걷어 올려 팔뚝에 새겨진 수용자 번호를 보여줬다. 교황은 번호를 잠시 응시하더니, 몸을 굽혀 그녀의 팔뚝에 새겨진 수용자 번호에 입을 맞췄다. 그것은 76년간 매일 공포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번호였다. 교황은 지난 2016년 폴란드 사도적 순방 당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마음에서 우러나온 본능적인 애정의 몸짓으로 그녀와 이야기했다. 리디아 또한 말없이 교황을 포옹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리디아는 「바티칸 뉴스」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벅찬 마음과 지친 몸으로 인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황님의 입맞춤은 저에게 힘을 줬고, 세상과 화해하게 해줬습니다.”
자신의 삶을 증언하기 위한 이탈리아 방문
리디아는 교황과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저는 눈빛으로 서로를 이해했어요. 우리는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었어요. 말이 필요하지 않았거든요.” 유럽에 남은 몇 안 되는 나치 대학살의 생존자 중 한 명인 리디아는 현재 폴란드 크라쿠프에 살고 있다. 최근 그녀는 토리노 카스텔라몬테의 “살아있는 기억 협회(The Living Memory Association)”의 초청으로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증언을 들려주기 위한 다큐영화 “70072. 미워하는 법을 몰랐던 소녀” 제작을 위해 이탈리아에 머물고 있다.
리디아는 작년부터 예정돼 있었으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몇 차례 연기된 이번 이탈리아 방문에서 잠시 로마를 방문해 교황을 만나려는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주 이탈리아 폴란드 대사관 손님 자격으로 교황을 만난 리디아는 교황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두 명의 어머니, 아우슈비츠에서 잃은 어머니와 길러주신 어머니
어느덧 고운 모습의 노년의 여인이 된 리디아가 간절히 바랐던 교황과의 만남은 특별한 날, 곧 폴란드의 “어머니의 날”에 성사됐다. 리디아는 자신의 두 명의 어머니에 대해 말했다. “어머니의 날은 제게 특별한 날이에요. 왜냐하면 제게는 두 분의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분은 저를 낳으신 어머니입니다. 제가 3살 때 강제수용소에서 서로 헤어졌어요. 다른 한 분은 제가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날 때 저를 입양하신 폴란드 어머니예요. 그분을 통해 저는 구원됐어요.”
교황에게 전한 3가지 선물의 상징: 기억, 희망, 기도
수요 일반알현 말미의 짧은 만남의 순간에 리디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교황에게 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자기 인생의 토대가 되는 기억, 희망, 기도의 의미를 담은 3가지 상징적인 선물을 교황에게 전달했다. 기억을 상징하는 선물은 빨간 삼각형 모양의 배경에 하늘색과 하얀색 실로 폴란드의 가장 앞글자인 “P”를 수놓은 손수건이다. 이 손수건은 폴란드의 모든 생존자들이 해방기념일 행사에 지참하는 손수건이기도 하다. 희망을 상징하는 선물은 그녀의 조력자인 레나타 레흐릭이 그린 그림이다. 엄마의 손을 잡은 소녀가 기찻길 근처에서 멀리 떨어진 비르케나우 수용소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그림으로, 수백만 유다인들과 다른 수용자들의 종말의 시작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리디아는 기도를 상징하는 선물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사진이 있는 묵주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건넸다. 이 묵주는 그녀의 대자인 다리우스 신부가 축복한 묵주로, “매일 기도할 때 사용한 묵주”라고 설명했다.
3살, 강제 수용소로
리디아는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만큼,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에게 엄청난 악이 다가온 것이 고작 3살 때였음에도 말이다. 그녀는 지난 1941년 바도비체 출신 외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집을 떠나야 했고 사랑하는 이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들은 혁명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수감됐다. “당시 저는 아주 어렸습니다. 몇 살 되지 않은 때였죠. 하지만 옛 소비에트 연방에 살던 저는 이미 전쟁 속에 있으면서 여러 경험을 했어요. 저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악이라는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살았던 아우슈비츠에서의 삶은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어요.”
요제프 멩겔레의 생체실험
다른 폴란드 수용자들과 마찬가지로 리디아와 그녀의 어머니는 ‘P’라는 글자가 새겨진 줄무늬 수감자 복장을 입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리디아는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연령의 아이들이 가득한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곳은 당시에도 “죽음의 천사”라는 악명을 지닌 요제프 멩겔레의 생체실험 대상을 모아놓은 아동구역이었다. 사실 아동구역은 임신한 여인들, 쌍둥이 아이들, 기형아를 비롯해 멩겔레의 생체실험에 필요한 이들을 모아놓은 저장고 같은 곳이었다. 리디아는 멩겔레의 실험실에 “귀엽고 건강한 소녀”로 분류돼 보내졌다. 8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녀는 멩겔레가 그녀의 어린 몸에 무슨 실험을 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시의 “고통”과 “광기에 찬 그의 눈빛”은 기억하고 있다.
17년 후, 친어머니와 다시 만나다
해방 후 리디아는 모험 같은 삶을 살았다. 그녀는 한 폴란드 부부에게 입양됐고, 그들은 그녀의 진정한 가족이 됐다. 이후 그녀는 러시아 모스크바로 강제 이주됐다. “소비에트 연방 정부는 저의 이야기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어요.” 시간이 흘러 리디아는 친어머니와 다시 만나기 위한 강한 의지로 폴란드 크라쿠프에 다시 돌아왔다. 1962년 적십자를 통해 그녀는 친어머니를 다시 만났다. “어머니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어머니를 찾으려는 노력을 단념하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살고 계셨고, 17년이 지난 뒤 우리는 다시 만났죠. 아우슈비츠에서 헤어지면서 어머니는 우리가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머니는 그 약속을 지키셨답니다.”
하지만 수용소의 군인이 그들의 유대를 끊어놓기 전까지 평화롭게 함께했던 3년의 짧은 추억과 모녀의 정은 시간의 모래 속에 흩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린 그 여인은 리디아에겐 과거의 인물이지만, 여전히 사랑과 존경을 드려야 하는 인물이다. 그들은 부둥켜안고 오열하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리디아는 그녀를 언제나 “나의 첫 번째 엄마”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엔 자신을 입양한 가정에 남기로 결정했다.
젊은이를 위한 당부 “다시는 결코 그 잔악함으로 돌아가지 말기를”
리디아는 현재 많이 쇠약해졌지만, 어떤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생명을 붙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 사명은 나치즘과 민족주의의 망령이 재현되는 듯한 지금 이 시대에 성장하고 있는 새로운 세대의 기억 속에 자신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리디아는 「바티칸 뉴스」와 「바티칸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호소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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