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헝가리 정부 관계자들에 “민족주의를 넘어 모든 이의 발전을 위한 평화” 촉구
Salvatore Cernuzio / 번역 박수현
“저는 정당에 볼모로 잡히지 않는 유럽, 자기중심적 대중영합주의의 먹잇감이 되지 않는 유럽, 기체처럼 휘발되는 현실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동적이고 추상적인 초국가주의로 변질돼 국민의 삶을 망각하지 않는 유럽을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4월 28일 다리(교량)와 성인, 역사와 기억, 혁명과 유배의 도시 부다페스트에서 이 같이 말했다. 교황은 이날 과거 가르멜 수도원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헝가리 정부가 사용하고 있는 청사에서 헝가리 정부 관계자, 각국 외교관, 시민사회 대표들을 만나 오늘날 유럽에 상처를 입힌 전쟁과 분열을 이겨내고 유럽의 ‘정신’을 회복해 평화로 나아갈 수 있는 유럽 대륙의 꿈을 강조했다.
“현재 유럽 역사는 많은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를 생각하면 평화를 위한 창의적인 노력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쟁의 독주곡으로 점철된 합창
교황은 산도르 궁전 경내에 위치한 옛 수도원에 도착해 박수와 의장대의 환영을 받으며 노바크 커털린 에버 대통령과 오르반 빅토르 총리를 각각 약 20분 동안 만났다. 이어 교황은 방명록에 서명했다. 그런 다음 약 200명이 모인 홀로 이동해 연단에서 약하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다뉴브 강의 진주’ 부다페스트에서 우크라이나 국경까지 울려 퍼지는 평화를 위한 ‘외침’을 제안했다.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와 135킬로미터의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교황은 1년 넘게 공격을 받고 있는 이 땅을 바라보면서도 유럽 전체로 시야를 넓혀 헝가리의 역사와 형제애에 대한 소명을 상기시켰다. “전후 유럽은 유엔과 함께 국가 간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이제 더 이상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공동의 목표에 대한 큰 희망을 그렸습니다.”
“공동체 정치와 다자주의 강화를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모습은 먼 과거의 아련한 추억처럼 느껴집니다. 평화를 노래하는 합창의 꿈이 시들고, 전쟁의 독주곡이 이를 대신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목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큰 그림을 바라보는 정책
교황은 “평화롭고 안정적인 국가 공동체를 이룩하려는 열정이 정신에서부터 무너진 것 같다”고 한탄했다. “영향력을 끼치는 영토가 뚜렷해지고, 차이가 강조되고, 민족주의가 다시 부상하고, 상대방을 대할 때 더욱 혹독한 판단과 어조를 사용합니다. (...) 국제 차원에서도 정치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감정을 자극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쟁의 공포를 겪은 후 얻은 성숙함은 이를테면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하는 수준으로 퇴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는 개인이 전략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이익이 아니라 더 큰 그림을 바라보고 모든 이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정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곧, 권력, 사익, 단기적인 성과가 아니라 개인, 가난한 이들, 미래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정책 말입니다.”
유럽연합 창립 아버지들의 꿈
이 같은 역사적 전환점에서 유럽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통합하고, 다른 민족을 맞아들이며, 누가 됐든 영원한 적으로 삼지 않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았다. 교황은 유럽 정신, 곧 “자신의 시대와 국경, 당장의 필요를 넘어 분열을 악화시키지 않고 통합을 회복할 수 있는 외교 형태를 창출할 수 있었던 유럽연합 창립 아버지들의 열정과 꿈”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로베르 쉬망(프랑스)과 콘라트 아데나워(독일)를 비롯해 특별히 알치데 데 가스페리(이탈리아)를 언급하며 그들의 말을 인용했다. “문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비례한 창조적 노력 없이 세계 평화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조화
오늘날 위험이 너무 많은데도 위험을 없애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교황은 다리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다페스트를 하나로 이어주고 어우러지게 하는 세체니 다리를 예로 든 교황은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이 다리를 보면 헝가리의 생태적 관심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현실을 연결하는 다리는 획일성이 아닌 통합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합니다.”
“국가 간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27개국의 유럽도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쪽의 고유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모두의 기여를 필요로 합니다. 한쪽을 단조롭게 획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잘 스며들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조화, 곧 어우러짐입니다.”
이와 관련해 교황은 헝가리 헌법을 인용했다. “개인의 자유는 다른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의 국가 문화가 유럽연합의 다채로움에 풍요롭게 이바지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스테파노 성인의 유산
헝가리 국민들의 격언(‘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낫다’, jobb adni mint kapni)과 헝가리 헌법 내에 깊숙이 뿌리내린 정신은 헝가리 왕국의 초대 국왕 스테파노 성인의 유산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복음의 참행복의 정신에 따라 약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소수자들을 돌보라는 끊임없는 요구도 담고 있다. 일찍이 스테파노 성인은 그의 아들에게 “다른 언어와 관습을 갖고 오는 사람들이 ‘나라를 장식’한다”며 “언어와 관습이 하나뿐인 나라는 약하고 무너지므로 이방인들을 자비롭게 맞아들이고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방인 환대
교황은 오늘날 헝가리 정부 정책의 중심이자 논란의 중심으로 떠오른 ‘환대’라는 사안이 “분명 복합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따뜻이 맞아들여야 할 이방인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분쟁과 빈곤, 기후변화로부터 달아나는 절망에 빠진 수많은 형제자매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이 문제는 변명이나 지체 없이 해결돼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상황에선 조만간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이 문제는 함께 공동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황은 유럽 역시 “거부한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이 같은 시대적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안전하고 합법적인 방법과 공유된 체계 안에서 일하는 게 시급”하다며 “그렇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경고했다.
건전한 평신도 의식
교황은 “자선활동과 교육활동을 장려”하고 “전 세계, 특히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구체적으로 지원”한 데 대해 헝가리 정부에 감사를 표했다.
“국가와 교회 간의 협력은 각자의 고유영역을 신중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항상 존중하면서 유익한 결실을 맺어 왔습니다.”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점을 명심하고 복음을 변함없는 준거점으로 삼아 “권력 논리에 부역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해방적인 가르침을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건전한 평신도 의식”이 필요하다.
“성스러움에 관한 모든 측면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면서도 이익의 제단에 서슴없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는 도처에 만연한 세속주의(laicismo)로 변질되지 않는 건전한 평신도 의식(laicità)이 필요합니다.”
젠더 이론과 낙태할 권리
교황은 “이른바 젠더 문화의 경우처럼 성별 차이를 없애거나 (...) 자유에 대한 환원적 개념을 삶의 현실보다 앞세우는 ‘이념적 식민화’가 택하는 사악한 길”을 규탄했다. 아울러 준비한 원고를 잠시 내려 놓고 “예를 들어 무의미한 ‘낙태권’을 성과로 자랑하는 것은 항상 비극적인 패배”라며 “유럽에는 평균 연령이 46-48세인 국가들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 출산과 가정에 대한 효과적인 정책을 통해 개인과 민족을 중심으로 한 유럽을 만드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요? 서로 다른 국가가 한 가족을 이뤄 각 구성원의 성장과 고유성을 보호하는 유럽을 만드는 것입니다.”
유럽의 굳건한 유대
교황은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유명한 세체니 다리의 ‘사슬’의 은유를 사용하며 “여러 개의 크고 다양한 고리들이 서로 연결돼 견고함과 힘을 발휘하는 모습을 통해” 그러한 유럽을 상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 같은 전망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도움이 된다”며, 헝가리는 구체적으로 에큐메니컬(교회 일치 운동)의 특성을 살려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교황은 “기도의 장소이자 그 자체로 형제애의 다리”인 판논할마 수도원을 떠올리며 “여기서는 서로 다른 종파가 마찰 없이 서로 존중하고 건설적으로 협력하며 더불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성인들과 복자들의 증거
교황은 성인들과 복자들의 활동과 증거로 헝가리의 역사를 장식한 모든 성인들을 잊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헝가리 왕국의 초대 국왕 성 스테파노와 “전 세계에 널리 퍼진 증거”를 보여준 성녀 엘리사벳 외에도 성 라디슬라오와 성녀 마르가리타 등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성스러운 땅 판노니아 지역의 ‘백색 순교’의 삶을 살아낸 위대한 증거자들”이 있다. 또한 요제프 민첸티 추기경, 순교 복자 빌모스 아포르 주교와 졸탄 메즐레니 주교, 복자 라슬로 바티야니 스트라트만 등 “지난 세기의 위대한 인물”도 있다. “그들은 다양한 신앙을 가진 많은 의로운 이들과 함께 여러분 조국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입니다.” 교황은 이들에게 “헝가리의 미래”를 의탁하고, 이를 위한 기도와 친밀함을 보장했다. 아울러 고국을 떠나 살아가는 헝가리인들, 자신이 살아오면서 만난 모든 헝가리인들,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을 때 자신에게 도움을 준 수녀회 공동체를 “특별히 생각”한다고 말했다.
“주님, 헝가리인들을 축복하소서!”(Isten, áldd meg a magyart!)
대통령의 연설
교황 연설에 앞서 노바크 대통령은 교황을 향해 “고통과 희망이 공존하는 마음”으로 연설했다. “우리 헝가리인들은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헝가리로 피난 온 15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을 돕기 위해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뿔뿔이 흩어진 가족의 고통을 보고, 자녀를 애도하는 어머니의 울부짖음을 듣습니다. 그들 중에는 우크라이나 최서단에 위치한 자카르파티아 지역의 헝가리인을 선조로 둔 어머니들도 있습니다. (...) 우리는 불의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와 공동의 미래를 보호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들은 무엇보다도 전쟁이 아닌 평화를 원합니다. 우리는 자녀와 남편을 전선에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화로 가는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무기를 내려놓으려는 진정한 의지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불붙은 전쟁, 과열된 감정을 식혀야 한다는 깨달음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지요!”
노바크 대통령은 “존경하는 교황 성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헝가리인과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교황님을 평화의 사도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황님이 키이우와 모스크바, 워싱턴, 브뤼셀, 부다페스트, 그리고 평화를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모든 이들과의 대화에 나서시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기 부다페스트에서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정의로운 세계 평화를 위해 개인적으로 중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만남이 끝날 무렵 노바크 대통령은 오르반 총리와 함께 부다페스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구 가르멜 수도원 건물 뒤편의 테라스로 교황을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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