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룩셈부르크 사도 순방… 이주민들의 사연 담긴 편지 받아
Salvatore Cernuzio
프란치스코 교황은 2주 전 인도네시아로 긴 해외 사도 순방을 떠날 때와 다름없는 미소로, 룩셈부르크로 향하는 이타항공 비행기에 탑승한 60여 명의 언론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인사를 건넸다.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봉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항상 여러분께 열려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46번째 해외 사도 순방의 목적지는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다. 직전 사도 순방보다 짧고 덜 부담스러운 일정이지만, 교황의 열정은 여전하다.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기쁨에서 나오는 열정이다.
“저는 여러분께 열려 있습니다”
9월 26일 오전 8시29분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에어버스 A320neo가 이륙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교황은 종종 자신의 “순방 동반자”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직접 인사를 전하고자 했다. 짧은 비행시간 때문에 교황은 평소처럼 기자, 촬영 기사, 사진 기자들 사이를 다니며 악수하고 농담을 주고받거나 귓속말을 나누는 전통적인 인사를 할 수 없었다. 기내의 긴 통로를 가리킨 교황은 이렇게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그 ‘여정’을 하지 못하겠네요.” 그리고 다시 한번 “감사하다”를 반복했다.
세네갈에서 온 선물과 메시지가 담긴 가방
기자들이 교황을 위해 준비한 선물들은 여느 때처럼 많았다. 교황청 공보실장 마테오 브루니가 이 선물들을 하나하나 모아 교황에게 전달했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이주 문제와 관련해 교황의 관심을 반영한 사연들이 담긴 선물이었다. 스페인 라디오 방송 ‘코페’(Cope) 특파원 에바 페르난데스가 교황에게 전한 이 선물은 세네갈산 직물로 만든 가방으로, 카나리아 제도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데 아냐사 본당의 ‘착한 사마리아인’ 재단 소속 아이들이 만든 것이다. 이 재단은 지속적으로 이주민과 난민이 유입되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이주민과 난민 수용 활동을 펼치고 있다. 카나리아 제도는 “새로운 람페두사”로 불릴 만큼 많은 이주민들이 도착하는 곳이다. 교황은 카나리아 제도를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으며, 싱가포르 방문 후 귀국 기자회견에서도 다시 한번 이 의사를 표명했다.
바다에서 겪은 오디세이아
교황의 이 소망은 멀리 카나리아 제도까지 전해졌고, 이주민들은 에바 페르난데스 기자를 통해 자신들이 겪었던 고된 여정을 편지에 담아 교황에게 전하고자 했다. 유럽의 문턱에 다다르기까지 마주한 고난의 여정, 어쩌면 강제로 감내해야 했던 비극적인 오디세이아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들의 편지는 세네갈 직물로 만든 가방에 담겼다. 가방 안에는 카나리아 제도의 현지 예술가가 제작한 그림과 함께 페르난도 클라비호 카나리아 제도 주지사가 교황의 관심에 감사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또한, 한 이주민이 상륙 당시 도움을 준 사제에게 건넨 이슬람 묵주 ‘미스바하’도 함께 전달됐다.
손수 쓴 편지들은 미셸, 우세이누, 브라이트, 우스만, 아비보의 서명이 담겼다. 이들은 모두 아프리카의 가난과 비극을 피해 떠나온 이주민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집과 가족, 고향을 떠나야 했던 슬픔의 기록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과 재탄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주민들의 이야기
미셸은 세네갈을 떠난 미성년자였다. 그의 편지에는 세 형제 중 막내였던 그가 7일 동안 갈아입을 옷도 없이 여행해야 했던 사연이 담겨 있다. 인신매매범들이 그의 배낭을 배에 싣지 않고 떠났기 때문에, 그는 젖은 티셔츠와 바지를 입은 채 여행을 이어갔다. 섬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 “착한 사마리아인” 재단이 미셸과 그의 친구를 맞아들였고, 그는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 덕분에 세네갈에 있는 가족을 도울 수 있게 됐다고 그는 편지에 썼다.
우세이누 폴 역시 세네갈 출신이다. 그는 미셸보다 나이가 많지만, 그 역시 여행 중에 겪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여행 중에 여러 사람들이 갈증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편지에서 교황이 카나리아 제도를 방문한다면, 그곳에서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는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만약 그날이 온다면, 우세이누는 수많은 이주민들이 배를 타고 도착하는 아르기네긴 항구에서 교황의 안내자로 직접 나서겠다고 말했다.
세네갈 출신의 우스만은 시인이었다. 그는 보트를 타고 떠난 자신의 여정을 시로 표현하며, 자신이 겪었던 공포를 은유와 비유로 풀어냈다. “추위가 제 손가락을 비틀었고, 배고픔은 마치 실처럼 위장 속을 감돌았습니다. 습기와 바닷소금이 피부를 찢었으며, 속눈썹은 소금 결정으로 변했습니다.”
아프리카 탈출 이야기
구겨진 종이에 적힌 이야기는 나이지리아에서 정치적 박해를 피해 2008년에 탈출한 브라이트 오바노르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세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두 달 후 리비아에 도착해 몇 달 동안 일하며 조금씩 돈을 모아 시칠리아로 떠났다. 그곳에서 7개월을 보낸 후, 파도바로 이주했다. 파도바의 거리에서 그는 세 달 동안 노숙 생활을 했지만, 그곳에서 아내와 재회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프랑스에 가기로 결심했지만, 행복한 결말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브라이트는 서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아일랜드로 가면 서류를 해결해 주겠다는 한 지인의 제안에 3700유로를 지불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기였다. 그는 더블린으로 가는 중간 경유지였던 테네리페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현재 그의 서류가 처리 중이다. 지금 그는 학업을 재개한 상태다.
기니비사우 출신의 아비보 단파는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한 몇 안 되는 그리스도인 중 한 명이다. 그는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아비보는 고향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자신의 학비와 형제들의 학비를 마련했다. 그러나 결국 돈이 부족해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 배로 카나리아 제도의 엘이에로 섬에 도착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굶주림과 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고 교황에게 고백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왜 유럽에서의 새로운 삶을 꿈꾸며 떠날 수밖에 없는지를 담담하게 전했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주민들이 유서 깊은 유럽대륙의 심장부인 벨기에를 종착지로 삼으며 고향을 등진다. 9월 26일 저녁, 교황도 그 땅에 발을 디디며 또 하나의 여정을 시작한다.
번역 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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