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희년 성문 열며 “폭력이 짓밟고 간 자리에 희망을 심읍시다”
Salvatore Cernuzio
조용히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기도와 묵상에 잠긴 모습이었다. 구원의 역사가 새겨진 청동문을 두드리자,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문이 활짝 열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희년이 시작됐다. 희망의 문이 열렸다. 대사와 용서, 새로 태어남과 쇄신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제 우리는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거룩한 여정을 시작한다.
“삶이 깊은 상처를 입은 곳에서, 배신으로 무너진 기대 속에서, 산산이 부서진 꿈들 사이에서,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실패들 속에서, 더는 버틸 힘조차 없는 이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 패배감에 젖어 쓸쓸히 살아가는 이들의 아픈 고독 속에서, 영혼 깊숙이 새겨진 고통 속에서, 재소자들의 끝없이 길고 허망한 나날들 속에서, 가난한 이들의 차디찬 좁은 방들 속에서, 전쟁과 폭력이 휩쓸고 간 황폐한 터전에서 희망을 전하도록 합시다.”
세계 곳곳에서 모인 “희망의 순례자”
성문을 여는 순간은 그 자체로 장엄했다.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교황의 경건한 발걸음과 함께했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예식을 지켜보던 2만5000여 명의 신자들과 대성전 내부의 6000여 명의 신자들은 그때까지 깊은 기도와 함께 교황의 도착을 기다리며 숨죽인 채 경건함 속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바티칸 성가대와 함께 대성전 안팎에 울려 퍼지는 입당 성가를 한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교황의 뒤를 이어 중국, 이란, 오세아니아 지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온 54명의 순례자들이 성문을 통과했다. 깃털 장식 모자를 쓴 이들, 꽃으로 만든 머리띠를 한 이들, 터번을 두른 이들이 줄지어 2026년 1월 6일 교황이 닫을 그 성문을 통과했다. 이들은 추기경과 주교, 사제들,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의 대표자들, 로베르토 괄티에리 로마 시장과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등 정부 당국자들과 함께 최초의 “희망의 순례자들”로서 그 순간을 함께했다.
전쟁의 아픔
“모든 이에게 희망의 문이 열리길 바랍니다. (...)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교황은 대성전에서 열린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전례 예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황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빛에서는 깊은 감동이 묻어났다. 이번 희년은 지난 2016년 세상에 자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자 선포된 특별 희년에 이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두 번째 희년으로, 가톨릭 교회의 제27차 정기 희년이다. 첫 희년이 시작된 지 천 년도 채 되지 않았으며, 교회가 새천년기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선포한 “대희년” 이후로는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세상 끝(아르헨티나)에서 온” 88세의 교황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할 수밖에 없는 위기와 폭력, 전쟁으로 신음하는 세상에 희망을 불어넣고자 한다. 교황은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강론에서 준비된 원고를 잠시 내려놓고 “총탄에 쓰러지는 어린이들”이나 “학교와 병원을 무너뜨리는 폭탄” 등 비극적인 현실을 고요한 목소리로 짚어냈다.
“오늘 밤은 희망의 문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밤입니다. 오늘 밤은 하느님께서 모든 이에게 말씀하시는 밤입니다. ‘너에게도 희망이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희망은 약속이지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희망의 성모상이 모셔지고, 꽃으로 장식된 제단 그리고 신자들로 가득 찬 대성전에서 교황은 희년에 선물로 주어지는 “그리스도교의 희망”이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행복한 결말이나 영화의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지금 여기,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 땅에서 받아들여야 할 주님의 약속입니다.” 교황은 이 희망이 우리에게 “지체하지 말고” 발걸음을 내딛으라 요구하는 “특별한 무언가”라고 설명했다. “실로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그분 안에서 가장 큰 희망을 되찾아, 그 희망의 빛을 지체 없이 어두운 세상 구석구석에 전하는 순례자가 돼야 합니다.”
“희망은 죽지 않았습니다. 희망은 살아 있습니다. 희망은 영원히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희년입니다. 이것이 희망의 때입니다!” 교황은 큰 소리로 말했다. “희년은 우리를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기쁨으로 초대하고, 영적 쇄신의 길로 이끌며, 이 세상을 진정한 희년의 때로 변화시키는 여정에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이 희년이, 이윤 추구의 논리로 상처 입은 우리의 어머니 지구를 위해, 부당한 빚더미에 짓눌린 가난한 나라들을 위해, 옛 것과 새것의 온갖 속박에 묶인 모든 이를 위한 참된 희망의 때가 돼야 하겠습니다.”
“지체하지 마십시오”
교황은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고, 그 희망을 우리 안에서 새롭게 하여, 우리 시대와 세상의 황폐한 땅에 다시 심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교황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황폐함이 우리 시대를 뒤덮고 있다고 한탄했다. “전쟁의 포화, 총탄에 쓰러지는 어린이들, 학교와 병원을 무너뜨리는 폭탄 아래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생각합시다.” 교황은 “지체하지 말 것을, 관습에 끌려다니지 말 것을, 안일함과 게으름에 머물지 말 것”을 다시 한번 촉구했다. “희망은 진리를 찾아 나서는 순례자가 되고, 결코 지치지 않고 꿈꾸는 이가 되며, 하느님의 꿈, 곧 평화와 정의가 다스리는 새 세상에 대한 꿈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이들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밤에 태어나는 희망은 안주하는 이들의 무기력함과 자신의 안락함 속에 자리잡은 이들의 나태함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러한 안락함 속에 안주하려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희망은 자신을 위태롭게 할까 두려워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거짓 신중함이나 자기만을 생각하는 계산논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행되는 악과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안일한 삶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담대함”, “책임”, “연민”의 길은 하느님 마음의 “거룩한 문”이 열리는 이 밤부터 시작되는 특별한 때에 교황이 우리에게 보여준 영적 여정이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강론을 마무리했다. “그분과 함께라면 기쁨이 피어나고, 그분과 함께라면 삶이 변화되며, 그분과 함께라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대성전 구유 앞에서
미사 말미에 교황은 다양한 국적의 어린이들과 함께 아기 예수상을 모시고 대성전 내에 마련된 구유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황은 그곳에 아기 예수상을 정성스레 모신 뒤, 고요한 침묵 중에 한동안 기도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교황은 이 성탄의 모습을 우리 삶의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일깨웠다. 이어 중앙 통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양쪽에 늘어선 신자들에게 인사했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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