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희망이 메말라가는 시대, 희년은 새로운 희망”
Salvatore Cernuzio
위기와 전쟁으로 시련을 겪는 인류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 그것이 바로 희년이다. 희년을 통해 주어지는 “은총”은 우리에게 “영적 쇄신과 용서, 사회적 해방”으로 이끌어 주기에, 단순히 행사 준비나 해야 할 일들에만 매달려 그 거룩한 의미가 퇴색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 곳곳의 공사현장들은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지만, 동시에 이는 “로마가 생명력이 넘친다”는 증거이며 “새롭게 태어나고” “더욱 따뜻한 환대의 도시가 되고자 새로운 요구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표징”이기도 하다. 희망의 희년 개막을 앞두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12월 8일 스페인 광장 인근 미냐넬리 광장에 우뚝 선 역사적인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바치며 하늘의 은총과 이 땅의 현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길 간구했다.
올해도 성모님 앞에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맞아 교황은 올해도 어머니이신 성모님 앞으로 돌아왔다. 성 요한 23세 교황 이후 역대 교황들이 그러했듯이,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한 번도 이 공경 예식을 거르지 않았다. 감염병의 세계적 확산으로 엄격한 통제상황이 벌어졌던 시기에도 변함없었다. 당시 교황은 군중이 모이는 시간을 피해, 동이 트기도 전 이른 새벽녘에 고급 상점들이 즐비한 로마 중심가를 홀로 찾아 그 전통을 이어갔다.
모든 참석자들에게 인사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아내려 담요와 덮개로 몸을 두른 병자들이 맨 앞줄에 자리했다. 우산이나 망토를 걸친 신자들과 행인들이 둘러싼 가운데, 교황은 따뜻한 미소로 참석자들을 맞이했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로베르토 괄티에리 로마 시장과 로마교구 총대리 발다사레 레이나 추기경이 교황을 맞이했다. 레이나 추기경은 전날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추기경 서임식을 통해 추기경단에 들게 됐다. 교황은 레이나 추기경에게, 그가 추기경으로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라며 정겨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날 교황은 복자 비오 9세 교황이 반포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교리를 기념하여 세워진 성모상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꽃을 봉헌했다. 이 성모상은 조각가 주세페 오비치와 건축가 루이지 폴레티의 작품이다. 교황은 두 명의 교황청 의전관의 도움을 받아 성모상 기둥 아래 흰 장미 대형 꽃바구니를 봉헌했다. 그 옆에는 이미 이탈리아 그리스도교 노동조합(ACLI)을 비롯해 거동이 불편한 병자와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루르드 성모성지를 순례하도록 함께하는 단체 우니탈시(UNITALSI) 등 여러 단체들이 정성스레 준비해 놓은 화환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광장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로마 시장과 교구 총대리 외에도 교황청 복음화부 첫복음화와 신설개별교회부서 장관 직무 대행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 안젤로 코마스트리 추기경, 교황청 국무원 국무장관 에드가르 페냐 파라 대주교, 주교황청 스페인 대사 마리아 이사벨 셀라 디에게스 등이 함께했다. 교황은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이 뜻깊은 자리에 함께한 수많은 자원봉사자들과 경비대, 가족들, 노인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성모 대성전 방문
교황은 스페인 광장에서의 성모 공경 예식 거행에 앞서 작년과 마찬가지로 성모 대성전에 잠시 들러 ‘로마 백성의 구원’이신 성모 성화를 찾았다. 교황은 지난 몇 년 간 이 성화 앞에서 120회 이상 기도하며 해외 사도 순방과 자신의 건강을 성모님께 의탁했다. 로마 백성의 보호자이신 성모님 앞에서 교황은 홀로 잠시 침묵 중에 기도했다.
헌화
오후 3시45분경 교황은 차량으로 미냐넬리 광장으로 이동했다. 교황이 도착하기 직전, 투우 반대 시위를 벌이던 일부 활동가들이 교황 경호 행렬 차량 쪽으로 달려들려 했으나, 교황청 헌병대가 신속히 제지했다.
외투도 우산도 없이 서 있던 교황의 턱에는 이틀 전 부딪혀서 생긴 멍자국이 아직 남아있었다. 교황은 가장 먼저 고개를 들어 27미터 높이로 로마를 굽어보시는 성모님 성상을 바라봤다. 합창단의 기도가 끝나자 교황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시여, 오늘 어머니의 대축일을 맞아 저희가 어머니 곁으로 모여들었나이다.”
“저희가 바치는 이 꽃들로 저희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고자 하오나, 어머니께서는 특별히 작은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숨은 기도와 한숨, 눈물이라는 보이지 않는 꽃들을 더욱 귀하게 보시고 기뻐하시나이다. 어머니, 이들을 굽어보소서. 이들을 지켜주소서.”
희년과 도시의 공사현장
교황은 다가오는 희년을 “어머니”께 의탁하며, 로마가 “위기와 전쟁으로 시련을 겪는 인류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가 될 희년”을 준비하고 있다고 기도했다. “이런 까닭에 도시 곳곳에 공사현장이 있나이다. 어머니께서도 아시듯 적지 않은 불편을 초래하고 있으나, 이는 로마가 생명력 넘치게 살아있으며, 새롭게 태어나고, 더욱 따뜻한 환대의 도시가 되고자 새로운 요구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표징이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이를 넘어 더 멀리 보시나이다. 어머니의 지혜로운 목소리가 저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나이다. ‘나의 자녀들아, 이런 일들은 좋으나 영혼의 공사를 잊지 말아라! 진정한 희년은 내면에 있다. 너희의 마음 안에, 가정생활과 이웃관계 안에 있으니,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것은 바로 이 내면에서 이뤄져야 한다.’”
쇄신과 용서의 때
교황은 준비된 기도문 원고를 내려놓고 이렇게 덧붙였다. “희년은 고해성사를 하고 모든 죄의 용서를 청하기에 좋은 기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십니다. 언제나 모든 것을 용서하십니다.”
교황은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문 형식을 빌어 성모님의 당부를 강조했다. “어머니의 권고는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되오니, 저희는 이를 절실히 필요로 하나이다. 저희가 원치 않더라도 단순히 행사 준비와 해야 할 일들에만 매달려 영적 쇄신과 용서, 사회적 해방을 위한 희년의 은총이 메마르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옵니다.”
“로마 시장을 위해 기도합시다”
교황은 기도문을 잠시 내려놓고 뒤에 서 있던 괄티에리 시장을 향해 마음을 전했다. 교황은 시장을 가리키며 “이 자리에 함께한 시장은 이 희년 행사가 좋은 결실로 이어지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야 할 일이 많은 시장님을 위해 기도합시다.”
영혼을 좀먹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질투의 독
이어 교황은 기도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처음 설교하신 복음 사화를 상기했다. “어머니께서는 그곳에 놀란 사람들 가운데 계시면서 당신 아드님을 자랑스러워하셨으나, 동시에 폭력을 낳는 닫힌 마음과 시기의 비극을 예감하셨나이다. (…) 어머니, 시기와 질투의 어둠으로부터 저희를 해방시켜 주소서. 저희 모두가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영혼을 좀먹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질투의 독을 정결케 하시어, 저희 안에 평화가 깃들게 하소서.”
“거룩하신 어머니, 감사하나이다! 희망이 메말라가는 이 시대에도 저희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병자들과 기자들에게 인사
기도문 낭독을 마친 후 영대를 걸친 교황은 모든 참석자들에게 강복했다. 이어 휠체어를 타고 광장을 돌며 참석자들, 특히 병자들에게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넸다. 교황은 어린이들과 노인들 앞에 멈춰 서서 그들을 축복하고,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손을 잡아줬다. 스페인 주교회의 라디오 방송 「코페」(COPE) 특파원이자 교황과 면식이 있는 에바 페르난데스 기자에게는 아르헨티나 초콜릿을 선물했다. 감동에 겨워하던 그녀는 교황에게, 이날 삼종기도 말미에 언급된 미국 교도소 사형수들의 감형을 위한 호소를 떠올렸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현안에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샤갈의 “하얀 십자가” 전시회에 깜짝 방문
“교황님 만세!”를 외치는 환호 속에 흰색 피아트(500L) 승용차가 미냐넬리 광장을 떠났다. 그러나 차량은 산타 마르타의 집으로 가는 대신 코르소 거리에 있는 치폴라 궁에 도착했다. 교황은 로마 소재 ‘누오보 무세오 델 코르소’에 전시 중인 마르크 샤갈의 ‘하얀 십자가’(1938)를 관람했다. 이 작품은 2025년 희년을 위한 예술행사의 일환으로, 교황청 복음화부가 기획하고 로마 재단과 협력해 주최한 “로마의 샤갈: 하얀 십자가” 전시회의 핵심작품이다. ‘하얀 십자가’는 교황이 각별히 아끼는 작품이다. 일찍이 교황은 아르헨티나 언론인 세르히오 루빈과 프란체스카 암브로게티와의 대담집 『예수회원: 호르헤 베르골료와의 대화』(El Jesuita)를 통해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잔인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평온함이 감도는 고통을 보여줍니다.” 교황은 나치 정권이 유다인을 조직적으로 탄압한 ‘수정의 밤’(크리스탈나흐트) 사건 이후인 1938년 샤갈이 완성한 이 걸작품을 두고 지난 2013년 8월 예수회 교양지 「치빌타 카톨리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당시 교황으로 갓 선출된 그는 “미술에서 나는 카라바조를 존경한다”며 “그의 그림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샤갈의 ‘하얀 십자가’도 저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2015년 피렌체 방문 때도 교황은 산 조반니 세례당에 전시된 이 작품을 감상한 바 있다.
번역 이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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