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크 추기경 “시노드 여정, 교황님의 선교적 ‘꿈’을 일관되게 실천하는 과정”
Cardinale Mario Grech
선교와 시노달리타스의 관계는 제목에서부터 명확히 드러나는, 말하자면 “도식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와 시노달리타스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두 요소는 상호 보완하며 함께 성장하고, 제삼천년기 교회의 여정을 함께 그려 나갑니다.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세계주교시노드 소식이 발표됐을 때, 일각에서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7항에 언급된 바와 같이 “교회 안에서만 끝나는”(introversione ecclesiale) 시도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표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오늘날 전 세계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선교적 회심을 이루기보다는, 내부 조직에만 골몰하고 집착하여 스스로 폐쇄될 위험이 있다는 염려였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번 시노드 여정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7항에서 설명하신 바와 같이, 교회의 관습과 구조를 복음화의 도구로 변화시키기 위해 선교적 “꿈”을 일관되게 실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선교 선택’을 꿈꿉니다. 교회의 관습과 행동 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모든 교회 구조가 자기 보전보다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복음의 기쁨」, 27항).
“사목 쇄신을 요구하는 구조 개혁은 이러한 의미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곧, 모든 구조를 더욱 선교 지향적으로 만들고, 모든 차원의 일반 사목 활동을 한층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 만들며, 사목 일꾼들에게 ‘출발’하려는 끊임없는 열망을 불러일으켜, 예수님께서 우정을 맺도록 부르신 모든 이에게서 긍정의 대답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27항). 교황님의 말씀은 2021-2024년 세계주교시노드 여정이 지향하는 “변혁”의 비전을 예고한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방식과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 더 나아가 “회심”으로 이끄는 “프로젝트”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혁은 교회로 하여금 열린 마음과 함께 밖으로 나아가는 사목 활동으로 이끌어 복음 선포의 사명을 더욱 충실히 수행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세계주교시노드의 목표는 교회가 내부적으로 더 많은 시노드 방식을 배움으로써 그 자체로 세상에서 더 신뢰받는 증거를 하고 더 효과적인 선교사명을 수행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주교시노드의 주제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이며, 부제는 “친교, 참여, 선교사명”으로 명시되었습니다. “선교”라는 단어가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그 중요도가 낮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밖으로”(ad extra), 곧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급박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이번 세계주교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새롭게 수용하는 과정으로, 우리의 선교 개념을 신학적, 사목적으로 더욱 깊이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이 발전 과정을 (1) 포용-변방 (2) 상호문화성-분권화 (3) 참여-공동책임 등 몇 가지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시노드 여정이 드러내고 있는 첫 번째 측면은,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선교사명에 충실하려면 더욱 포용적인 교회로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2021-2022년과 2023-2024년 시노드 과정에서 자료 검토를 계기로 로마로 모인 여러 교구, 국가, 대륙의 종합 보고서들은 교회가 배타적이고 포용하지 않는 공동체로 인식된다는 문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을 닫아거는 교회, 일종의 세관 같은 교회, 통행료를 요구하는 교회라는 이미지입니다. 물론 포용은 특정 형태의 화해주의나 무관심주의, 혹은 상대주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꿔야 할 것은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방식입니다. 복음의 참된 논리 안에서 포용은 우리를 울타리 밖, 곧 주변부와 경계, 변방으로 나아가라고 요구합니다. 특히 교황님이 말씀하시는 ‘변방’은 단순한 지리적 개념을 넘어선 인간학적이고 실존적인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변방은 교회의 선교사명이 가장 먼저 집중해야 할 영역입니다. 두 번째 측면은 첫 번째와 연결되며, 시노드 과정에서 제기된 요구입니다. 곧, 교회가 보다 유연하고 분권화된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유일한 복음이 다양한 민족과 문화 안에 스며들 수 있도록, 이들과 더 깊이 연결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한마디로, 교회가 더욱 “상호문화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우리는 “교회”(단수형)가 단일한 교회만이 아니라 여러 “교회들”(복수형) 안에 존재하며, 이 두 개념이 하나의 교회 신비 안에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재발견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단수형, 곧 “단일성”을 더 중시하여 ‘베드로와 함께 베드로 아래’(cum et sub Petro)로 일치하는 가운데 분열과 오류를 방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복수형, 곧 “다양성”을 더 강조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는 일치가 획일성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고, 성령께서 다양한 민족과 그들의 다채로운 문화 속에 흩뿌리신 진리와 은총의 씨앗들이 자라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교황님이 「복음의 기쁨」 16항에서 이미 말씀하셨듯이, 건실한 ‘분권화’의 필요성은 시노드 여정을 통해 다시금 강력히 제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옛 문화와 새 문화의 대화를 통해서만 복음 선포가 개인과 민족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시노드 여정의 핵심개념은 바로 참여입니다. 모든 이가 하나의 선교사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황님이 여러 차례 반복하신 성직자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철학적 혹은 정치적 평등주의에 기초한 이념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교적 열망을 품은 목자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로 성직자 중심주의는 평신도들의 복음화 사명에 대한 잠재력을 억압하고, 그 결과 교회의 선교사명을 약화시켜 세상 안에 복음이 뿌리내리는 데 있어 교회를 더욱 취약하게 만듭니다. 성직자 중심주의는 선교에 헌신하는 교회 일꾼의 수를 제한하고, 그 역할을 오직 성직자들에게만 국한시킵니다. 그 결과 “평범한” 신자들은 마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선교 명령이 그들과는 무관한 것처럼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게 됩니다.
이렇듯 시노드 여정은 교회가 더 큰 참여와 공동책임을 실현할 때, 그만큼 선교사명도 더욱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는 걸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세례를 통해 받은 직무는 누군가를 다른 이와 대립시키는 ‘권한’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사랑으로 섬기신 것처럼 형제자매들을 위한 봉사의 ‘은사’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선물”인 동시에, 그 선물을 타인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책임”이자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 목표는 교회 안에서 형제적 친교를 이루고 세상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 곧 선교에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배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형제적 사랑과 봉사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파비오 나르델리 신부님의 깊이 있는 분석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교회 쇄신에 대한 공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출판물이 더욱 널리 알려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바티칸에서, 2024년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번역 이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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