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친밀함, 진리, 희망의 하느님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도록 내어 맡깁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8일 금요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에서 ‘세계 적십자·적신월사의 날’을 맞아 관련 기관에서 구호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축복을 청했다. 교황은 강론에서 주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시고, 진리와 희망 안에서 위로하신다고 강조했다.

VATICAN NEWS / 번역 안주영

지향

오늘(5월 8일)은 ‘세계 적십자·적신월사의 날’을 기념합니다. 관련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구호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을 축복하시길 빕니다. 

강론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저녁 식탁에서 이뤄진 대화입니다(요한 14,1-6 참조). 예수님은 슬퍼하십니다. 제자들도 모두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3,21 참조).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모든 이는 끔찍한 일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낍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위로하기 시작하십니다. 왜냐하면 ‘위로’ 또한 주님의 과업,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위로하시는 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위로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참으로 진실한 위로, 곁에서 머무는 위로가 있는가 하면, “(…)에 삼가 조의를 표하며”라고 적힌 애도 전보와 같은 형식적인 위로 방식도 있습니다. 하지만 형식적인 방식으로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저 위로하는 척할 뿐이고, 요식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은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장면입니다. 우리 역시 살면서 슬픈 순간들을 겪게 되는데, 그때 주님이 베푸시는 참된 위로를 알아차릴 수 있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의 구절에서 주님이 언제나 친밀하게 곁에서 머무시고, 진리와 함께 희망 안에서 위로하신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위로’에는 다음의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주님의 위로는 ‘곁에 머무는 친밀한’ 위로입니다. 결코 멀리 떨어져서 하는 위로가 아닙니다. “(여기에) 있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여기에) 있다.” “내가 너와 함께 여기에 있단다.” 때론 침묵 가운데 머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바로 여기에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은 항상 계십니다. 이러한 친밀함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자 인간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친밀함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빈 말보다 오히려 침묵을 선호하십니다. (이 침묵은 우리) 곁에 머무는 힘, 현존의 힘입니다. 많은 말을 하기보다 곁에서 함께하는 위로입니다. 

친밀함과 더불어 예수님의 위로의 두 번째 방식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는 분이십니다. 거짓으로 형식적인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 “아니다. 걱정하지 마라. 모두 지나갈 것이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그냥 지나갈 것이다. (…)”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진실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당신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진리이다”(요한 14,6 참조). 그리고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 간다”, 곧 “나는 죽을 것이다”(요한 14,2-3 참조). 우리는 죽음 앞에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를 꾸밈없고 온화하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은 진리를 감추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예수님의 위로 방식은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희망 안에서 위로하십니다. 맞습니다. (지금은) 끔찍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 또한 나를 믿어라”(요한 14,1 참조). “너희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요한 14,2 참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자리의 문들을 열어 놓기 위해 먼저 가십니다. 우리 모두는 그 문을 통해 들어갈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우리 중 누군가가 이 세상을 떠나러 길을 나설 때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너희를 데려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주님은 오셔서 우리의 손을 잡고 데려가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아니다. 너희는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별거 아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 곁에 있다. 이것이 진리다. 끔찍하고 위험한 순간, 죽음의 순간이다. 하지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하고, 평화, 곧 모든 위로의 근원인 평화 안에 머물러라. 내가 와서 너희의 손을 잡고 내가 있는 곳으로 너희를 데려 갈 것이다.”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끔찍한 일을 당할 때면 주님께 자주 화를 내고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달콤하고 친밀하며, 온화하고 진실한, 희망인 그분의 말씀조차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김을 배우는 은총을 청합시다. 주님의 위로는 진리(의 말씀)이므로 속임이 없습니다. (주님의 위로는 고통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까이에 머물고, 진리를 말하며, 우리에게 희망의 문을 열어 주는 위로입니다. 

영적 영성체(신령성체) 기도문

미사에 물리적으로 참례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한 ‘영적 영성체(신령성체)’ 기도문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께서 진실로 성체 안에 계심을 믿나이다. 

세상 모든 것 위에 주님을 사랑하오며,

주님의 성체를 영하기를 간절히 원하나이다. 

지금 주님의 성체를 영할 수 없다면 적어도 영적으로라도 제 안에 오소서.

주님, 성체를 모실 때처럼

주님과 온전히 일치하려 하오니

영원히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의 영적 영성체(신령성체)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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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5월 2020,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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