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유럽 일치를 위한 교황의 기도… “기도는 교회를 전진하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10일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부활 제5주일 미사를 봉헌하며 ‘유럽의 날’과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억했다. 교황은 강론에서 기도가 하느님 아버지께 다가가는 통로라고 강조했다. 이어 기도의 전능한 힘을 믿고 기도할 용기를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VATICAN NEWS / 번역 이창욱

지향

“지난 이틀 동안 두 가지 기념 사건이 있었습니다. (5월 9일은) 유럽연합을 시작하게 했던 로베르 쉬망 선언 70주년이었고, (5월 8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기념일이었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유럽이 일치를 키워나가도록 주님께 기도합시다. 이러한 형제적 일치 속에서 모든 이가 다양성 안에 일치를 키워가길 기도합시다. 

강론

예수님의 고별연설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4,1-14 참조). 아울러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와 함께 있을 것이며 당신을 믿는 사람도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2-14)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복음의 이 구절은 아버지께 올라가는 선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삶 속에 늘 계셨고 예수님도 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들과 들판의 백합을 돌보시듯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 (바로 그런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그분에게 청했을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마태 6,9)(라는 ‘주님의 기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늘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십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이 구절에서는 훨씬 강합니다. 게다가 이는 마치 기도의 전능함이라는 문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으므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이루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1 참조).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신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실상) 기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용기, 이러한 솔직함이 필요합니다. 똑같이 필요합니다. 우리 성조 아브라함을 생각해 봅시다. 그가 소돔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과 “흥정”했을 때 말입니다(창세 18,20-33 참조).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고 봅니다. “(의인이) 그 수보다 모자란다면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보다 더 적으면? 더 적어도 (파멸시키시렵니까)? (...)” (아브라함은) 정말로 “협상”할 줄 알았습니다. 늘 이러한 용기가 있었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만, 조금만 더 깎아주십시오. 조금만 더, 조금 더요 (...)” (사실) 기도하는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겨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 중에는 항상 싸움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다음으로 모세를 살펴봅시다. 주님이 두 번이나 당신 백성을 없애버리려 하셨고(탈출 32,1-35; 민수 11,1-3 참조) 그를 다른 민족의 지도자로 만들려고 하셨을 때, 모세는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께 ‘아니오’라고 말했던 겁니다! 용기를 냈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중얼거리듯 소심한 기도를 바치러 간다면, 그런 기도는 존중이 부족한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는 아버지께 가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용기와 솔직함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필요한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제1독서에서 초대 교회에 일어났던 분쟁을 들었습니다(사도 6,1-7 참조).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이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벌써 그 당시에 불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습성이 보입니다. (...) 그들의 과부들과 고아들이 홀대를 받았기 때문에 불평을 터뜨렸던 겁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많은 일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성령의 빛을 받아 부제들을, 말하자면, “창안”했습니다. “한 가지 일을 해봅시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은 사람 일곱을 찾아내어 그들이 식탁 봉사를 맡게 하십시오”(사도 6,2-4 참조). 부제는 교회 안에서, 봉사직의 수호자입니다. “이와 같이 불평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을 각자 필요한 일에서 돌봐주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5 참조).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주교의 임무입니다. 곧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들었던 힘을 갖고 말입니다. 주교는 예수님이 주신 신뢰를 갖고, 용기를 내어, 대담함(파레시아)으로,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러, 아버지께 나아가는 첫 번째 사람입니다. 주교의 첫 번째 임무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저는 어떤 사제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훌륭하고 거룩한 본당신부였습니다. 그 신부님이 주교님을 찾아갈 때면, 아주 상냥하게 인사를 잘 하고 나서, 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교님, 주교님은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하십니까?” 그리고 늘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주교님의) 첫 번째 임무는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백성을 지켜주시도록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가 공동체를 위한 공동체 수장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주교의 기도, (주교의) 첫 번째 임무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주교가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성령께서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부분을 행할 뿐이지만 그분은 교회의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교회를 앞으로 이끌어줍니다. 이러한 까닭에 교회의 수장들, 말하자면 주교들은 기도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예언적입니다. “부제들이 이 모든 일을 하게 합시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이 보살핌을 잘 받고 문제가 해결되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도 해결될 겁니다. 대신 우리 주교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좋은 주교님들, 정말 훌륭한 주교님들이, 좋은 분들이긴 하지만, 금전 문제나 이러저러한 많은 일들로 분주한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기도를 첫 번째 자리에 둬야 합니다. 그 다음에 다른 일들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들이 기도의 자리를 빼앗아버릴 때, 무엇인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에서 들었던 것처럼 기도는 강력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요한 14,12-13). 이처럼 교회는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용기를 통해 전진합니다.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교회는 알기 때문입니다. 

영적 영성체(신령성체)를 하기 위한 기도문

미사에 물리적으로 참례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한 ‘영적 영성체(신령성체)’ 기도문

오, 나의 예수님,

당신의 발 아래 엎드려

당신의 거룩한 현존의 심연 안에서

하찮은 저의 마음과

통회하는 저의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 사랑의 성체 안에서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제 마음은 

당신께 드리는 초라한 거처 안에서

당신을 영하고자 합니다.

당신의 성체를

직접 영할 수 있는 기쁨을 기다리며

영적으로나마 당신을 모시길 원하오니,

오, 나의 예수님,

제가 당신께 갈 수 있도록

저에게 오소서.

당신의 사랑이

삶과 죽음을 통해

저의 온 존재를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당신께 희망을 걸고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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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5월 202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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