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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거짓된 관계를 갖지 마십시오”

성인들처럼 하느님과의 참된 관계로 살아야 교회의 선포가 더 믿을만한 것이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반알현을 통해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내용으로 십계명에 대한 교리교육을 진행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아울러 교황은 오는 8월 25-26일에 있을 아일랜드 사도적 순방을 위해 신자들에게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십계명에 관한 교리교육을 계속 이어갑시다. 오늘은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탈출 20,7)에 대한 계명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모욕하거나 부적절하게 사용하지 말라는 초대로 이 말씀을 이해합니다. 이 명확한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혹은 부적절하게 사용하지 않고 이 귀중한 말씀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말씀을 더 잘 들어 봅시다. “부르지 말라(Non pronuncerai)”라는 말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너는 그것을 스스로 취하지 않고, 너는 그것을 너 자신에게 짐 지우지 말라(non prenderai su di te, non ti farai carico)”라는 뜻입니다.

“부당하게(invano, 헛되이, 함부로)”라는 표현은 더욱 명확합니다. 그 뜻은 “텅 빈, 헛되게(a vuoto, vanamente)”입니다. 빈 봉투나 내용이 없는 양식을 나타냅니다. 이는 위선, 형식주의, 거짓말, 그리고 단어의 사용이나 하느님 이름을 사용하는데 나타나는, 비어있고 진리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성경 안에서 ‘이름’은 사물, 특히 사람들의 친밀한 진리입니다. 이름은 자주 (그 사람의) 사명을 나타냅니다. 예컨대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창세 17,5 참조)과 복음서들에 나오는 시몬 베드로(요한 1,42 참조)는 자신들의 삶의 방향이 바뀐다는 걸 드러내는 (의미로)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곧,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아는 순간부터 그의 (삶의) 역사는 변합니다(탈출 3,13-15 참조).

유다인의 예식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욤 키푸르(Yom Kippur, Giorno del Grande Perdono, 대속죄일)날에 장엄하게 선포되며 백성들은 죄를 용서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이름을 통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생명과 접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이름을 취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강한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현실을 취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계명은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매일의 행동들을 하느님과의 친밀한 친교 속에서, 곧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매번 십자성호를 그을 때마다 이를 확신합니다. 십자성호를 긋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십자성호 긋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여러분은 어린이들이 십자성호를 어떻게 긋는지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어린이들에게 “십자성호를 그으세요”라고 하면 어린이들은 무언가를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어린이들은 십자성호를 긋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어린이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십자성호를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는 바로 어린이에게 있어 신앙의 첫 번째 행동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십자성호를 긋는 법을 가르쳐주는 건 여러분의 과제입니다. 여러분이 해야할 일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위선적으로, 형식적으로, 텅 빈 상태로 취할 수 있는가? 대답은 불행히도 긍정적입니다. 예,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거짓된 관계를 맺으며 살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여러가지를 행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충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실행하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 군중들처럼 우리는 하느님과의 거짓된 관계를 맺고 살 수 있습니다. 이 십계명의 말씀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거짓이나 위선으로 맺지 말라는 초대이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맡기라는 관계로의 초대입니다. 결국 주님 안에서만 삶을 찾을 수 있다고 체험하면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우리 자신의 삶을 모험에 빠뜨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이론만 말하는 셈입니다.

이것이 감동을 시키는 그리스도교입니다. 성인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까? 왜냐하면 성인들은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고, 여러 가지를 말할 때 감동을 받습니다. 그들은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인들 안에서 우리 마음이 절실하게 바라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곧, 진실성, 참된 관계, 근본적인 것들을 봅니다. 우리는 이를 “우리의 일상 안에 계시는 성인들” 안에서 봅니다. 예컨대 성실하고 단순하고 정직하고 관대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부모님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첫 번째 청원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를 실천하면서, 거짓없이 하느님의 이름을 스스로 취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생겨나면, 교회의 (복음) 선포는 더 많이 듣고 더 믿을 만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체적 삶이 하느님의 이름을 나타내면, 세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 몸과 그리스도의 몸 사이에 위대한 친교가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있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찬례가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이는 앵무새처럼 말하거나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으로 기도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이후부터는 아무도 자신을 경멸할 수 없고 자신의 존재를 나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가 행한 것이 무엇이든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의 이름이 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깨에 메고 가십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취하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끝까지 우리의 이름을, 심지어 우리 안에 있는 악까지도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고, 당신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넣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메고 가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께서는 이 계명 안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를 취했으니, 너도 나를 취하라(Prendimi su di te, perché io ti ho preso su di me).”

누구든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지라도, 충실하고 자비로운 사랑이신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청하는 이에게 결코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여러분이 집에 가서 해야할 숙제로 돌아가 봅시다. 아이들에게 십자성호를 잘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22 8월 2018, 1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