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스타일은 온유함입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주님의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9.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느님의 스타일은 온유함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께 드리는 두 번째 청원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마태 6,10)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라고 기도한 다음 신앙인은 하느님의 나라가 빨리 오길 바라는 소망을 나타냅니다. 이 열망은 말하자면 갈릴래아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선포하시며, 설교를 시작한 그리스도의 바로 그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이 말씀들은 전혀 위협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이며 즐거움의 메시지입니다.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나 악을 행한 데 대한 죄책감을 심으면서 회개하라고 사람들을 재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추종자들을 모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단순히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것은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회개로 부르십니다. 모든 이들은 “복음”을 믿도록 초대받았습니다. 하느님의 권위는 당신 자녀들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일을, 다음과 같은 은총을 선포하십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가 거룩함의 길을 걷도록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재림에 관한 표징은 많고 모두 긍정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병든 자들과 사회적으로 배척된 사람들, 예컨대 나병환자들과 같은 배척된 사람들과 그 누구보다도 더 큰 죄인이면서도 정의로운 척했던 이들로부터 경멸 받았으나 (예수님께로부터) 치유 받은 죄인들을 돌보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정의로운 척했던) 이들을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다음과 같은 표징들,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을 가리키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당신(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오십시오!”라고 강하게 반복해서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여전히 세상은 죄로 물들어 있고, 고통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과 화해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과 전쟁에 의해, 그리고 많은 형태의 착취에 의해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로, 예컨대 어린이들의 인신매매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러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아직 완전히 이행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많은 남녀들이 여전히 닫힌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상황들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입술에서 ‘주님의 기도’의 두 번째 청원이 피어납니다. “당신(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오십시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며,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주님이시라는 것이 우리는 필요합니다!” “당신의 나라가 오십시오. 우리와 함께 해주십시오.”
때때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왜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언어를 통해 당신 승리에 대해 말씀하길 좋아하십니다. 예컨대, 하느님 나라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최악의 실수는 우리가 잡초처럼 보이는 것을 세상에서 즉시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같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내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세상에 세워지게 하는 것은 폭력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스타일은 온유함입니다(마태 13,24-30 참조).
하느님의 나라는 확실히 위대한 힘이며, 세상의 기준에 따르지 않는 그 어느 것보다 더 위대한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가) 절대적으로 다수결을 갖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습니다. 누룩은 (밀가루와 섞여) 겉으로는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밀가루 덩어리를) 발효시킵니다(마태 13,33 참조). 또한 (하느님 나라는) 작아서 거의 보이지 않지만, 자연의 폭발적인 힘을 내재하고 있어서 일단 자라면 정원의 모든 나무들 중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는 겨자씨와도 같습니다(마태 13, 31-32 참조).
하느님 나라의 이 “운명”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의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당시 사람들을 위한 약한 표징이셨으며, 당시의 공식적인 역사가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요한 12, 24 참조)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씨앗의 상징은 웅변적입니다. 어느 날 농부가 (씨앗을) 땅에 묻습니다. 마치 장례식을 치르는 행동과 같아 보입니다. 그런 뒤 (농부가)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릅니다.”(마르 4,27 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돌보십니다. 우리를 항상 놀라게 하십니다. 성 금요일의 밤 이후에, 희망으로 온 세상을 비출 수 있는 부활의 여명이 있음에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당신(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오십시오!” 우리의 죄와 실패 가운데서 이 말씀(청원)을 씨 뿌립시다. 인생에서 패배하고 고개를 숙인 사람들에게, 사랑보다 증오에 맛들인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쓸모 없는 날들을 산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선물합시다.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에게, 역사의 모든 순교자들에게, 쓸데없이 투쟁했다고 결론 내리거나 이 세상에서는 악이 항상 지배한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선물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기도’의 응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성령께서 모든 성경에 넣으시며 봉인하신 것과 동일한 희망의 말씀을 언제고 반복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곧 갈 것이다!”입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주님의 교회가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당신(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오십시오!”는 마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간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방식대로 매일 오십니다. 우리는 이를 신뢰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그분이) “그래, 내가 간다. 내가 곧 간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당신(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오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