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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악을 막는 방패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27일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에서 창세기의 처음 장들을 해설했다. 교황은 악이 기름얼룩처럼 퍼져 나가지만, 의로운 사람들의 기도는 희망을 회복시키는 '생명의 연결고리'라고 말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4. 의로운 사람들의 기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교리 교육은 의로운 사람들의 기도에 대해 살펴봅시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악의 존재를 경험합니다. 일상적인 경험입니다. 창세기의 처음 장들은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점진적인 죄의 확산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는 질투의 신과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너그러운 의도를 의심합니다(창세 3,1-7 참조). 여기서 반란이 생깁니다. 곧, 그들은 그들의 행복을 바라시는 관대하신 창조주를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악한 자의 유혹에 굴복하면서 절대적인 권능을 취하려는 망상에 사로잡힙니다. “우리가 이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5장 참조). 이것이 유혹입니다. 마음속에 생기는 야망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경험은 반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들의 눈이 열려, 아무것도 없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7절 참조).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유혹자는 좋지 않은 대가를 치르게 하는 자입니다. 나쁜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악은 다음 세대와 함께 더욱 파괴적이고 강력해집니다. 바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창세 4,1-16 참조). 카인은 동생 아벨을 질투합니다. 질투의 벌레가 있었습니다. 카인은 자신이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벨을 자신의 장자권을 넘보는 경쟁자로 보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악이 얼굴을 내밉니다. 카인은 이를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악이 그의 마음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나쁘게 바라봅니다. 이러한 일이 생각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나에게 해를 끼칠 거야.” 이러한 생각은 마음으로 들어갑니다. (…) 이처럼 첫 번째 형제애 이야기는 살인으로 끝납니다. 저는 오늘 인간의 형제애를 생각합니다. (…) 온 세상이 전쟁으로 가득합니다. 

카인의 자손들은 공예와 예술을 발전시키지만, 복수의 찬가처럼 울려 퍼지는 라멕의 재앙의 노래에서 드러난 폭력도 발전시킵니다.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23-24). 복수입니다. “당신이 행한 것에 대가를 치를 것이다.” (복수는) 판사가 이렇게 저렇게 판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상황을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은 모든 상황을 통제할 때까지 기름얼룩처럼 퍼져 나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셨다”(창세 6,5). 전 세계적 홍수(6-7장 참조)와 바벨탑(11장 참조)의 장엄한 이야기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새로운 창조와 같은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성경의 처음 장들에는 또 다른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에 덜 띠고, 훨씬 더 겸손하고 신심적이며, 희망의 구속을 나타내는 기록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증오와 정복을 인간사의 큰 동력으로 삼고, 잔인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하더라도, 성실하게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고, 인간의 운명을 다른 방법으로 써 내려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벨은 맏배를 주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벨이 죽은 후 아담과 하와는 세 번째 아들인 셋을 낳았습니다. 셋은 에노스(‘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낳았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했다”(창세 4,26)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하느님과 함께 살았으며”,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에녹이 등장합니다(창세 5,22.24 참조). 아울러 의롭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던”(창세 6,9) 노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노아를 보시고 인류를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철회하십니다(창세 6,7-8 참조).

이러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기도란 세상에서 자라나는 악의 홍수를 막는 인간을 위한 방패이자 피난처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면밀히 살펴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구원되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주님, 제발 제 자신과 저의 야망들과 저의 욕망들에서 저를 구하소서.” 성경의 처음 장들에서 볼 수 있는 기도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진정한 기도는 폭력적인 본능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눈길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을 돌보기 위해 돌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종교의 수많은 의인들이 이 같은 기도를 구현하였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69항). 기도는 인간의 증오가 사막만 넒혀갈 수 있는 곳에서 ‘새로 태어남’의 화단을 가꿉니다. 기도는 강력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느님의 권능, 곧 항상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새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주권이 세상에서 종종 오해를 받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관통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기도로 끌어내는 하느님 권능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성장합니다. 이러한 관계망은 헤드라인을 장식할 정도로 시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럴지라도 세상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어떤 분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 정부의 중요한 일을 맡은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마음속에 종교적 감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무신론자였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것이 그분의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자 그 기억이 다시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래, 할머니는 기도하셨었지. (…)” 그분은 할머니가 사용했던 기도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기도는 항상 생명의 연결고리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씨앗을 뿌리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생명의 씨앗을 뿌립니다. 작은 기도라는 씨앗 말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아이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십자성호를 긋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아이들에게 십자성호를 잘 그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성호를 긋는 것은 첫 번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그들은 (나중에 자라면서) 기도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시절에 배운 첫 번째 기도는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기도는 생명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여정은 (의로운) 사람들을 통해 흘러갑니다. 하느님의 여정은 인류의 “나머지”를 거쳐갑니다. 그들은 가장 강한 이들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당신의 기적을 행하시길 청하고, 특히 돌과 같은 인간의 마음을 살과 같은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길 청원하는 이들입니다(에제 36,26 참조). 이것이 (우리의) 기도에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돌과 같은 우리의 마음을 인간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면서, 하느님을 향한 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커다란 인류애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류애를 통해 제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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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5월 2020, 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