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없이는 그리스도교도 없습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23. 전례 안에서 기도하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교회 역사상 공적 전례 예식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는 내면주의 그리스도교(cristianesimo intimistico)를 믿으려는 유혹이 있었던 것이 여러 번 확인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종종 쓸모없거나 해로운 부담으로 간주되는 (전례의) 외적 예식에 의존하지 않는 종교의 순수함이 더 크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비판의 핵심은 특정한 예식 형태라거나 예식 거행의 특정한 방식이 아니라 전례 자체, 곧 기도의 전례적 형태에 있었습니다.
사실, 전례적 순간으로 적절하게 통합할 수 없었던 특정한 영성 형태를 교회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예식에, 특히 주일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면서도 자신들의 신앙과 영성생활을 위한 양식을 다른 데서, 곧 다른 신심 유형과 같은 데서 얻고 있습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는 이러한 긴 여정의 매듭을 푸는 것이었습니다. 헌장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위한 거룩한 전례의 중요성을 완전하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재확인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전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념이나 느낌이 아니라 살아 계시는 인격이시며, 그분의 신비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에서 요구되는 객관적인 중재를 발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구체적인 중재를 통해 전달됩니다. 곧, 성경, 성사, 전례 예식, 공동체를 통해 전달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영역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은 구원의 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몸으로도 기도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도 기도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신비의 거행에 뿌리를 두지 않는 그리스도인 영성은 없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회의 성사 전례에서, 구원의 신비를 선포하고 구현하며 전달하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명은, 기도하는 마음 안에 계속되고 있다”(2655항). 전례는 그 자체로 단지 자발적인 기도일 뿐만 아니라, 더 독창적인 그 무엇입니다. 곧, 전체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기반을 둔 행위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사건이며, 사실이며, 현존이며, 만남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사적 표징을 통해 성령 안에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로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해야 하는 필요성이 나옵니다. 저는 전례 없는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전례 없는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누락된 것입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옥중에 갇히거나, 박해시기에 집에 숨어서 거행했거나 거행하고 있는 보잘것없는 예식 안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안에 실질적으로 현존하시며 당신 자녀들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전례는 그 객관적 차원 때문에 열성을 가지고 거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예식 안에 쏟아 부어진 은총이 없어지지 않고, 각자의 인생 경험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합니다. “(신자는) 전례가 거행되는 동안과 그 후에, 그 전례를 내면화하고 그 전례에 동화된다”(2655항). 많은 그리스도인의 기도들이 전례에서 기인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기도가 전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사적 중재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성사를 거행하거나, 성찬례 중에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거나, 아픈 사람의 몸에 병자성유를 바를 때마다 그곳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병든 사람의 연약한 팔다리를 고치시거나, 최후의 만찬 중에 세상 구원을 위한 유언(말씀)을 전하실 때 행하시고 현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예수님의 성사적 현존 그 자체가 됩니다. 우리 외부에 있는 것이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이것을 전례는 먹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미사는 그저 “듣는 것”만이 아닙니다. “나는 미사를 듣기 위해 (성당에) 간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습니다. 미사는, 마치 우리와 아무런 상관없이 지나가는 그 무언가를 구경하는 구경꾼인 것처럼, 그냥 들을 수만은 없습니다. 미사는 항상 ‘거행됩니다’. 미사는, 미사를 주례하는 사제뿐만 아니라, 미사에 참례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거행됩니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은총과 사목의 다양성 속에서 그리스도의 행위에 참여합니다. 왜냐하면 그분, 그리스도께서 전례의 주인공이시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빛과 힘으로, 예수님의 몸짓과 말씀을 생생하게 하면서 자신들의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그 은총으로 얻은 자신들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영적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진정한 “혁명”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 없이, 특히 전례 기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미사에 참례할 때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됩니다. ‘나는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기 위해 (미사에) 가고,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기 위해 (미사에) 갑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세례성사에 참여할 때, 그곳에는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하지만, 신부님, 이건 생각일 뿐이고, 하나의 표현 방법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표현 방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실제로) 현존해 계십니다. 전례 안에서 여러분은 여러분 곁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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