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안에서 살아간다는 건 온유, 인내, 기도, 친밀함입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대한 교리 교육
14. 성령 안에서 살아가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가 방금 전에 들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갈라 5,16.25 참조).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한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첫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그와 반대방향,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길인 이기심을 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바오로 사도는 이를 “육의 욕망”(16절)이라고 부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는 이 여정의 인도자이십니다. 세례를 통해 시작되고 평생 지속되는 이 여정은 놀랍지만 힘든 여정입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산의 정상은 우리를 매료시키지만, 정상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력과 끈기가 필요합니다.
이 이미지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성령으로부터 “인도되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십시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의 행동, 하나의 움직임, 하나의 역동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첫 번째 난관을 만났을 때 멈추지 않고 “위에서 오는 힘”(『헤르마스의 목자』(Pastore di Erma), 43,21)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길을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얻습니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이 사라지거나 이기심과 교만의 부정적인 충동이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의 저항보다 더 강하시고, 우리의 죄보다 더 크시다는 것을 믿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이 길을 가라고 권고하면서 자신을 그들과 같은 수준에 둡니다. 명령형 동사 “살아가십시오”(16절)를 버리고, 직설법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 성령을 따라갑시다”(25절). 마치 ‘우리 자신을 같은 선상에 놓고 성령으로부터 인도되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깁시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권고입니다. 권고하는 방식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이 권고가 자기 자신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신다는 것(갈라 2,20 참조)을 알면서도, 자신이 아직 목적지인 산의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필리 3,12 참조). 그는 스스로를 자신이 속한 공동체 위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우두머리이고, 여러분은 수하들입니다. 나는 산의 정상에 이르렀지만, 여러분은 아직 길을 걷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점점 더 잘 응답하면서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기 위해 모든 사람의 여정 한가운데 자기 자신을 두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들과 함께 걸으며, 백성들과 거리를 두지 않는 목자들을 만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는 너무 아름다우며, 영혼에게 유익합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단지 개인의 행동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로 바오로 사도가 제시한 길을 따라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육의 욕망들”, “유혹들”, 곧 시기, 편견, 위선, 원한은 계속해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엄격한 규율에 의지할 때 쉽게 이러한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자유의 길에서 이탈하고, 정상에 오르는 대신 아래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성령의 길을 걷는 것은 우선 은총과 사랑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강한 말로 권고한 다음,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서로의 어려움을 짊어지며 누군가 실수를 저질러도 온유하게 대하라고 권고합니다(갈라 5,22 참조).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어봅시다.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영적인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라 6,1-2). 이는 험담하는 것과는 꽤 다릅니다. 험담은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것은 형제를 바로잡아 줄 때 이 같이 온유하다는 것을 뜻하며,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나쁘게 판단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 흔히 그렇듯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나약함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요! 험담하는 데 학위를 취득한 것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매일 다른 이들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나 자매를 바로잡아 주게 하는지, 그의 잘못에 대해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은 없는지 스스로 물어본다면 좋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온유함을 선물로 주실 뿐 아니라, 연대하며 다른 이의 짐을 져 주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한 인간의 삶에는 질병, 실업, 외로움, 고통, (…) 등 얼마나 많은 짐이 있는지요! 그리고 형제들의 친밀함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여러 시련들도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누군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이 같이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십시오. 여러분이 목소리를 높이려거든 마음으로는 사랑하십시오. 용기를 북돋아 주려거든, 아버지의 사랑을 보이려거든, 꾸짖으려거든, 엄격함을 보이려거든, 마음으로는 사랑하십시오”(『설교집』(Discorsi), 163/B 3). 언제나 사랑하십시오. 형제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최고의 법칙은 사랑입니다. 곧, 우리 형제자매들의 유익을 바라는 것입니다. 묵묵히 기도하면서 다른 이들의 문제, 다른 이들의 결점을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다른 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험담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 자신은 완벽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발가벗기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해서는 안 됩니다. 온유함, 인내, 기도, 친밀함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며, 기쁨과 인내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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