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대하듯 자발적인 마음으로 예수님께 기도합시다”
번역 김호열 신부
식별에 대한 교리 교육 3. 식별의 요소: 주님을 친근하게 느끼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식별’에 대한 교리 교육을 다시 이어갑시다. 식별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어디에서 오며 우리를 어떤 결정으로 이끄는지 식별해야 합니다. 오늘은 식별의 필수요소 가운데 첫 번째인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식별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환경, 곧 ‘기도’ 중에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영적 식별을 위해 없어선 안 될 보조수단입니다. 특히 감정적인 차원과 관련이 있을 때 기도는 우리가 친구에게 말하듯이 단순하고 친근하게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애정 어린 자발성으로 주님과의 내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삶의 비결은 하느님을 친근하게 느끼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그들이 더욱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참된 기도는 하느님을 친숙하게 대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지, 앵무새처럼 기도문을 낭송하는 게 아닙니다. 어쩌고저쩌고 (…)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대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친근함은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유익이 아니라는 두려움이나 의심, 때때로 우리 생각을 마음대로 들여다보고 우리 마음을 불안, 불확실하게 만들거나 심지어 우리 마음을 원통하게 만드는 유혹을 이겨내게 해 줍니다.
식별은 절대적인 확실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식별은 단순한 화학 방정식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식별은 삶에 관한 것이고, 삶이 항상 논리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단일 범주의 생각으로 묶일 수 없는 많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확실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면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가 묘사한 체험을 우리도 얼마나 많이 겪는지 모릅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9). 우리는 단순히 이성만 있는 것도 아니고 기계도 아닙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 지침을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주님을 위한 결단을 내리는 데 있어 관건은 도움이든 장애물이든 주로 마음에서 나오는 감정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마르 1,21-28 참조).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이를 사탄으로부터 구해 주십니다. 곧, 사탄이 태초부터 제시한 그릇된 하느님 모습, 곧 하느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그릇된 하느님 모습에서 그를 구해 내신 것입니다. 이 복음구절에 나오는 더러운 영이 들린 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알지만, 그것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24절) 하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이 같이 생각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지만, 그분이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는 점에 의심을 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우리 삶을 망치고, 우리 열망과 우리의 가장 강력한 포부를 희생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두려워합니다.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때때로 우리 내면에서 슬며시 고개를 쳐듭니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는 생각,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시고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들면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하지만 우리가 식별에 대한 첫 번째 교리 교육에서 살펴본 것처럼 주님과의 만남의 표지는 ‘기쁨’입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나면 기쁨이 넘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쁨이 되어 아름다워집니다. 하지만 ‘슬픔’이나 ‘두려움’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는 표지입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하고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히도 그 청년에게는 몇 가지 장애물이 있어 마음속에 품은 소망, 곧 “선하신 스승님”을 더 가까이에서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는 관심이 많고 진취적인 청년이었으며 주도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으나, 재물이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내면에서 감정의 분열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마음을 정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지만, 복음은 그 청년이 그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마태 19,22)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전합니다. 주님을 떠나간 사람은 막대한 재물과 기회가 있어도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절대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지만,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도의 가장 아름다운 것,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에게서 등을 돌리면 우리 마음에 슬프고 추한 것만 남게 됩니다.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식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를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친근하게 느끼면 의심과 두려움을 부드럽게 녹일 수 있습니다.’ 존 헨리 뉴먼 성인의 아름다운 표현에 따라 우리 삶은 점점 더 하느님의 “온화한 빛(luce gentile)”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성인들은 자신들의 시대에서 소박한 몸짓을 통해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현존을 보여줍니다. 오랫동안 함께 사랑하며 살아온 부부는 서로를 닮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애정을 담은 기도도 이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점진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우리 실존의 깊은 내면에서 샘솟는 타고난 본성을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 서서히 인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입술로만 기도문을 읊조리는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께 내 마음을 열고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시게 하여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 생각으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서 멀리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 은총을 청합시다. 곧, 친구가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주님과 우정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영신수련』, 53항 참조). 저는 한 신학원의 문지기였던 연로한 수사님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할 수 있을 때마다 성당에 가서 제대를 바라보며 “잘 지내시나요(Ciao)” 하고 인사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가깝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저는 당신 가까이에 있고, 당신도 제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맺어야 할 관계란 이런 것입니다. 곧, 친밀함, 정서적으로 가까운 관계, 형제자매 같은 가까움, 예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미소와 소박한 몸짓입니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말은 읊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친구가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서로를 위해 청해야 할 은총입니다. 곧, 예수님을 우리의 친구,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 우리를 강요하지 않고 우리가 당신에게서 멀어지더라도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 우리의 충실한 친구로 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그분께서는 우리 마음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뇨, 저는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네요.” 그러나 그분께서는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침묵 중에 우리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머물러 계십니다. 이 기도와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기도, 감정의 기도, 친밀함의 기도, 말은 적지만 몸짓과 선행으로 하는 기도, 곧 “잘 지내시나요(Ciao)” 기도로 기도합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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