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헝가리 교회에 “신앙은 이념이 아닙니다. 고통받는 이들 곁에 가까이 가십시오”
Michele Raviart / 번역 이재협 신부
사목적 도전에 최대한 잘 대처하기 위해 우리 시대의 변화를 해석하는 일은 역사의 중심이시며 우리 미래이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오직 그분의 영광을 묵상할 때라야 우리는 “체념하거나 파스카 사건의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서 세상에 불어 닥친 폭풍우와 우리 사회의 지속적이고 급격한 변화, 서구에서 벌어지는 신앙의 위기”를 바라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4월 28일 부다페스트 성 스테파노 주교좌성당에서 헝가리 교회 주교단, 사제단, 부제, 축성생활자, 신학생, 사목 협력자 등 1000여 명을 만나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연설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헝가리를 방문한 교황은 이날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하느님 손에 굳건히 맡겨져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처럼 우리가 “우리 시대의 변화와 도전을 마주하며 많은 열매를 맺도록 부름받았다”고 강조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이 계절을 잘 가꾸고, 계절의 징표를 읽어내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악의 마른 가지를 잘라내 열매를 맺도록” 부름받았다.
세속화 속에서 소통을 위한 새로운 언어 모색하기
교황은 헝가리처럼 “신앙 전통이 굳건히 뿌리를 내린 나라들”에서도 종종 세속주의가 만연한 모습, 곧 “가정의 온전성과 아름다움을 위협하고, 젊은이들이 물질주의 및 쾌락주의 생활방식에 노출되며, 새로운 도전과 현안에 대한 양극화를 초래하는 양상”을 목격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어려운 현실들은 “우리의 신앙을 자극하고 특정 주제에 대한 논의를 심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도전들은 어떤 방식으로 복음과 소통할 수 있는지 물음을 던진다”며 “새로운 접근방식, 소통수단과 언어를 모색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어떤 형태의 세속화를 마주하든 모든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교회를 정화하라는 도전과 초대가 있습니다.”
파국적인 패배주의를 피하고 세속에 순응하지 않기
교황은 이런 맥락에서 교회가 피해야 할 두 가지 유혹을 경고했다. 하나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과거의 가치를 모조리 잃고 앞으로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전혀 모른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파국적인 패배주의”다. 패배주의는 “완고함, 폐쇄성, 호전성으로 나아갈 위험”을 초래한다. 또 다른 유혹은 “세속에 순응하는 것”이다. 세속에 순응하는 자세는 패배주의보다 더 심각한 유혹으로, 이 시대를 “무비판적으로” 읽어내는 위험을 초래한다. 이러한 모습은 “안주하는 안락함에 바탕을 둔 채로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괜찮다고, 세상은 변했으니 우리도 그에 무비판적으로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유혹”이다. 교황은 따라서 “세속화라는 변화의 바람에 휩쓸리지 않도록 우리의 미래이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세속적인 것에 순응하는 일은 “온건한 이교도”의 모습이라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경고했다.
예언에 대한 열린 마음
교황은 교회가 두려움이나 완고함 없이 시대의 물음과 도전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며 “예언에 대한 열린 마음”을 당부했다.
“명시적으로 그리스도교 정신에 따른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도전이 되고 물음을 던지는 방식으로 다가오는 경우에도 현실에서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알아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동시에 모든 것을 세속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사제들의 업무 과부하
교황은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교회 내에서도 “사제들의 업무 과부하”와 같은 어려움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본당 사목이나 갖가지 사목 활동의 요구사항은 많은데 날이 갈수록 성소자는 감소하고 사제 수는 점점 줄어들며 사제들은 피로를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목자나 평신도 모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으로 책임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해결책은 세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컴퓨터가 아니라 감실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팀워크가 없으면 원수의 손에 놀아나게 됩니다
교황은 좋은 사목은 오직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사랑, 성령의 선물인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우리가 서로 멀어지거나 갈라진다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갈라진다면 팀워크를 발휘하는 대신 원수의 손에 놀아나기에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악마는 갈라놓는 자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악마의 전문분야입니다. 우리 주교들은 서로 소통을 이루지 못하고, 사제들은 주교와 긴장관계에 놓이고, 나이든 사제들은 젊은 사제들과 갈등을 빚고, 교구 사제들은 수도자들과, 본당 신부들은 평신도들과 갈등을 빚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교회 생활과 관련된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 측면에서도 각자의 이념적 입장만을 고수하면서 양극화됩니다.”
믿음의 실천은 하나의 이념으로 축소될 수 없다. 이념으로 축소된다면 그것은 악마에게서 온 것이다. 하지만 교황은 친교라는 귀중한 보화가 우리 손에 맡겨졌다며 “복음보다 부차적인 현실을 좇느라 보화를 허비하지 말자”고 당부했다.
박해받는 그리스도인, 이주민 곁에 가까이
교황은 “언제나 용서하는 자비로운 눈길과 연민의 마음”이 사제들에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돕고, 판단하거나 내치지 않는 대신 받아들이고, 비난하는 대신 격려하고, 험담하는 대신 봉사하는 것입니다.” 험담은 “사탕발린” 말로 남을 깎아내리기에 “멸망에 이르는 길”이 되곤 한다. 따라서 기도를 통해 이 길로 가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심지어 그런 유혹이 들 때 “혀를 깨물면” 물리칠 수 있다고 교황은 재치 있게 말했다.
“이러한 태도는 예언에 대한 열린 마음을 함양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곧, 세상의 고통과 가난이 있는 곳에 주님의 위로를 전하고, 박해받는 그리스도인, 받아들여질 곳을 찾는 이주민, 다른 민족 사람들, 도움을 구하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교황 연설에 앞서 삶을 증언한 이들에게 감사
교황은 자신의 연설에 앞서 삶을 증언한 모든 이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교황은 “주님과 잘 의논할 필요성”에 대한 나눔을 선보인 크리스티나 수녀의 이야기를 상기하며, 이는 모든 이가 교회의 성찰을 수행하도록 초대하는 기회라고 말했다. “과거에 만족하지 않으며 복음화를 위해 본당 구역을 재구성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목생활의 쇄신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교황은 교리 교사 도리나 씨의 이야기를 상기하며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일상을 어루만지며 소통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교황은 특히 모든 교리 교사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이들이 “교회의 기둥”이라고 말했다. 또한 1956년 헝가리 혁명 시기 많은 고초를 겪으며 목숨을 잃은 복자 야노스 브렌너 신부의 남동생 조세프 신부를 기억했다. 야노스 브렌너 신부는 지난 2018년 복자품에 올랐다.
“지난 세기의 전체주의 정권 시대를 거치며 얼마나 많은 증거자와 신앙고백자가 있었는지요! 여러분은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헝가리 성인들의 모범
헝가리 역사엔 참으로 위대한 성인들이 많다. 앞서 언급한 복자 야노스 신부는 공산정권하에서 많은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어 “원한을 품고, 더욱 폐쇄적이고, 완고해지기” 쉬웠을 텐데도 “착한 목자”의 모습을 실천했다. 오늘날의 헝가리가 속해 있던 과거 판노니아 지역에서 태어난 투르의 마르티노 성인은 자신의 망토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기로 결심하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회의 이미지”를 되새기게 했다. 자비와 친밀함, 이것이 바로 헝가리 교회가 유럽의 심장부에 가져와야 할 예언자적 증거다. 교황은 헝가리의 성인들 가운데 성모님께 나라를 봉헌한 헝가리의 초대 국왕 성 스테파노도 잊지 않았다. “성 스테파노는 모든 이의 말을 잘 듣고 대화를 나누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그는 세금을 낮췄으며, 자선을 베풀 때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했습니다.”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대화를 나누며 가장 약한 이들을 돌볼 수 있는 교회, 모든 이를 환대하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의 예언을 전하는 데 용기를 내는 교회, 이것이 바로 우리가 꿈꿔야 할 교회입니다.”
역사와 미래는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교황은 연설 말미에 종교 박해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건너간 헝가리 출신 예수수녀회 수녀들을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적이 있다며, 그들을 높이 평가했다. 이어 1975년 세상을 떠난 헝가리 출신 요제프 민첸티 추기경을 기억하고 “100만 명의 헝가리인이 기도한다면 미래는 두렵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말을 상기했다. 교황은 헝가리 교회 사목자들과 신자들에게 “완고한” 믿음에서 벗어나 복음의 예언을 증거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다. “역사와 미래는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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