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오늘날 버림받은 모든 이 안에서 예수님께서 사랑을 부르짖으십니다”
Adriana Masotti / 번역 이창욱
4월 2일 오전 10시. 약 6만 명의 신자들로 가득 찬 성 베드로 광장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맞이했다. 교황은 제멜리 종합병원에서 퇴원한 다음 날, 성주간을 시작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교황은 오벨리스크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올리브 가지를 축복했다. 이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군중이 환호하는 동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그리스도의 입성 장면을 묘사하는 마태오 복음의 구절이 낭독됐다. 그런 다음 이날 미사를 공동 집전하는 추기경, 주교, 사제들이 미사를 시작하기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있는 신자들 사이의 중앙 통로를 따라 대성전 앞 마당을 향해 행렬을 하고 교황은 전용차로 뒤따랐다. 추기경을 비롯한 공동 집전자들은 각자 평화의 상징인 종려나무(빨마) 가지를 들고 행렬했다. 추기경단의 부단장인 레오나르도 산드리 추기경이 성찬 전례를 주례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례는 그리스도 생애의 마지막 시간, 곧 돌아가실 때까지의 마지막 시간을 상기시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으신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씀은 그분께서 겪으신 고통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 말씀은 화답송 시편과 마태오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에서 반복된다. 교황은 이 구절을 중심으로 강론을 시작했다. 우선 교황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을 가리켜 채찍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의 육체적인 고통 그리고 배신, 조롱, 제자들의 도망과 같은 영혼의 고통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모든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 곁에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셨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부르짖으십니다.”
“모든 고통 중에서 가장 타는 듯한 고통, 곧 영혼의 고통이 여기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한 번도 아버지를 일반적인 이름인 ‘하느님’으로 부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 충격을 전하기 위해 복음서는 아람어로도 그분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유일하게 아람어로 우리에게 전해진 말씀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버림받고 하느님에게서 버림받는 극도의 자기낮춤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대가로 얼마나 큰 고통을 감내하셨는지 파악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 하늘의 문이 닫힌 것을 보신 그분께서는 실존의 난파선, 모든 확실성의 붕괴를 겪으시고 인생의 쓰라린 경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시며 ‘왜’라고 부르짖으십니다. ‘하느님, 왜, 어찌하여?’”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심연을 겪으시지만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교황은 성경에서 ‘버리다’라는 동사가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등장한다며 “우리를 다른 이들과 하나로 묶어주는 유대가 급격하게 끊어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악을 당신의 십자가에 짊어지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상황, 곧 버림받음과 하느님과의 거리를 겪으셨다”고 설명했다. 교황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항상 우리 곁에 계시려고, 우리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시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덧붙였다. “오늘 이 사건은 한낱 공연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저를 위해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혹은 다른 누군가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볼 때 –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 ,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고, 포기와 버림받음의 심연에 빠져들고, 답이 없는 수많은 ‘왜’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갈 때에도 여전히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그리고 저를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계셨고 지금도 여러분 곁에 계시기 때문에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거리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려고 버림받음의 거리를 견뎌내셨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곧, 내가 실패할 때마다, 우리 각자가 여러 번 실패할 때마다, 내가 배신당하거나 혹은 다른 이들을 배신할 때마다, 내가 소외되거나 혹은 다른 이들을 소외할 때마다, 내가 버림받거나 혹은 다른 이들을 포기할 때마다, 배신당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예수님을 생각하자고요. 바로 거기서 우리는 그분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오늘날 버림받은 이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지만 희망이 솟아나는 것은 바로 그 고통 속에서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으신다. 버림받았다고 부르짖으시지만 그 직후 당신 자신을 내어 맡기시고 아버지께 넘겨 주신다. 또한 버림받음의 순간에도 “당신의 제자들을 계속 사랑하시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받은 이들을 용서하신다. 교황은 “우리의 수많은 고통의 심연이 더 큰 사랑에 잠기면서 고립이 친교로 변하는 모습을 본다”고 강조했다. 버림받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 곧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을 바꾸는”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나 그분께서 현존하시는 모든 버림받은 이들 안에서 “당신을 찾고 사랑하도록” 부추긴다. 교황은 원고를 내려놓고 즉흥적으로 몇 달 전 성 베드로 광장의 주랑 아래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노숙인 남성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 ‘버림받은 그리스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착취당하고 내버려진 이들,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눈을 마주할 엄두도 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얼굴이 아니라 숫자로만 존재하는 이주민들, 사회에서 거부당한 수감자들, 문제아로 낙인찍힌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 홀로 방치된 노인들 – 그들은 어쩌면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 ,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자들, 멸시당하는 장애인들, 고통의 외침에 귀 기울여 주는 이 없이 내면에 큰 공허를 느끼는 젊은이들 등 우리 주변에는 보이지 않고 숨겨진 수많은 ‘버림받은 그리스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극단적 선택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오늘날 버림받은 이들, 오늘날의 그리스도들입니다.”
버림받은 모든 이 안에서 사랑을 부르짖으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은총
그러므로 예수님의 버림받음에서 누구도 외면하지 않고 아무도 홀로 내버려두지 말라는 요구가 나온다. 배척당하는 이들과 외로운 이들이 그분의 “살아있는 이콘”이기 때문이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초대하며 강론을 마무리했다.
“오늘 이 은총을 청합시다. 곧,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버림받은 모든 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법을 아는 은총 말입니다. 그들 안에서 끊임없이 부르짖으시는 주님을 보고 알아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무관심이라는 귀먹은 침묵 속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놓치지 맙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외롭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도록 합시다.”
성모님께서 우리가 성주간을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빕니다
교황은 ‘영성체 후 기도’ 후 미사 마침 예식에 앞서 삼종기도를 바쳤다. 먼저 교황은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특별히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친밀함을 표한 데 대해 감사를 전했으며 신자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아울러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갈망한다며 신자들에게 “마음의 친밀함으로 당신 아드님을 따르시고 그분과 한 영혼이 되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배우며 성주간을 지내자고 권고했다. 이어 성모님께서 “고통받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우리를 도우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교황은 교황 전용차(포프모빌)를 타고 성 베드로 광장을 천천히 돌면서 교황에게 사랑을 표현하려고 기다리는 수많은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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