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을 잊지 맙시다. 그리스도인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Alessandro Di Bussolo
“제발 가난한 이들을 우리 마음에서 지워버리지 맙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1월 17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제8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미사 강론을 이 같이 마무리했다. 이는 교회와 각국 정부, 국제기구뿐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향한 호소였다. 이날 강론에서 교황은 “우리 삶이 연민과 사랑으로 빚어질 때 주님 현존의 표징이 된다”고 강조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아픔 곁에 머무르시어, 그들의 상처를 따뜻이 어루만지시고 그들의 발걸음을 새롭게 이끄십니다.” 교황은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외면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가난한 이들을 향한 주님의 그 연민을 똑같이 느끼는” 이들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만큼” 교회가 본연의 모습으로, 곧 “참된 교회로 거듭나게 된다”고 말했다. “모든 이에게 열린 집, 모든 이의 삶을 향한 하느님의 연민이 깃든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난한 이가 되셨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전은 이날 신자들로 가득 찼다. 특히 이날 미사에 참례한 가난한 이들은 바오로 6세 홀에서 교황과 함께 오찬을 할 예정이었다. 미사는 교황청 복음화부 세계복음화부서 장관 직무대행 살바토레 리노 피시켈라 대주교가 주례했다. 교황은 참회예식에서 “우리를 위해 가난한 이가 되시고 그 사랑을 모든 이에게 넘치게 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우리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겸손되이 청하자”고 초대했다.
시대의 고뇌 속에서도 꺼질 줄 모르는 희망의 빛
교황은 이날 연중 제33주일 미사의 복음 구절(마르 13,24-32 참조)을 풀이했다. 교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격한 이들의 심정”을 묘사하셨다면서도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을 떨치며 오시는 놀라운 순간을 예고하셨다고 설명했다. “깊은 어둠과 황량함의 그때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바로 그때에, 하느님께서 오시어, 우리 곁으로 다가오시어, 사방에 있는 우리를 당신 품에 모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 예리한 시각을 갖추라고,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갖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 마음의 불안과 시대의 고뇌 속에서도 꺼질 줄 모르는 희망의 빛이 반짝이고 있음을 발견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불의 앞에서 느끼는 고뇌와 무력감
교황은 올해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우리 마음속에서 늘 서로 맞서 싸우는 고뇌와 희망”이라는 두 현실에 주목하자고 권고했다. 교황은 먼저 우리 시대에 만연한 고뇌를 언급했다. “소셜미디어가 문제와 상처를 증폭시켜 세상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미래를 더욱 불확실하게 만듭니다.” 교황은 “우리의 눈이 사건의 겉면만을 좇아간다면 우리 마음속에서 불안이 고개를 들고 말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게 되면 이날 복음 말씀처럼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는 것을, 굶주림과 기근이 수많은 형제자매들을 억압하고 있는 모습을, 전쟁의 참상을,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광경 앞에서 우리는 깊은 낙담의 수렁에 빠져 역사의 비극 속에 스며든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무력감에 가두어 버립니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낳는 불의가 우리 주변에서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안락함과 게으름으로 인해 ‘세상이 원래 그렇지’라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라고 체념하는 사람들의 물결에 그저 휩쓸려 갈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교 신앙마저 이 세상 권력들을 거스르지 않고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신심행위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희망을 밝혀줍니다
교황은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을 인용하며 “그러는 동안 세상의 한 편에서 불평등은 깊어만 가고, 경제는 약자들을 옥죄며, 사회는 돈과 소비의 우상 앞에 절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한탄했다. “이 모든 와중에 가난한 이들, 배제된 이들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립니다.” 교황은 복음에 나오는 묵시록적 광경 한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희망의 불씨를 피우신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우리의 시야를 넓혀 주시어, 우리가 세상의 불안정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 사랑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게 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며, 우리 구원을 위해 움직입니다. 복음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바로 그때,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분께서는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당신이 선택한 이들을 모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황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무엇보다 곧 다가올 당신의 죽음”을 가리키고 계신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사람의 아들은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분 부활의 권능이 죽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 악으로 상처 입은 역사의 잔해 위에서 새로운 세상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아름다운 비유를 통해 이러한 희망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고 설명했다.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마르 13,28).
“이처럼 우리도 이 땅의 생명을 꿰뚫어 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불의와 고통과 가난만이 가득한 듯 보이는 그곳에서,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긴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는 우리 곁으로 다가오시어 묶인 것들을 풀어주시고 생명이 새롭게 움틀 수 있게 하십니다.”
궁핍한 이의 눈을 마주 보나요?
교황은 “그리스도인다운 이웃사랑을 통해, 우리의 그리스도인다운 형제애를 통해” 주님께서 가까이 오신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궁핍한 사람의 손에 동전을 던져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손을 잡아주나요, 아니면 만지지도 않고 동전만 던져주나요? 여러분은 도와주는 사람의 눈을 마주 보나요, 아니면 다른 곳을 쳐다보나요?’”
가난한 이들의 고통 곁에 머무르며
교황은 성령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희망의 씨앗을 세상에 뿌릴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회칙 「Fratelli Tutti」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닫힌 세상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가운데 정의와 연대의 빛을 비출 수 있고 비춰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으로 빛나게 됩니다. 우리 삶이 연민과 사랑으로 빚어질 때 주님 현존의 표징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아픔 곁에 머무르시어, 그들의 상처를 따뜻이 어루만지시고 그들의 발걸음을 새롭게 이끄십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눈을 돌리나요?
교황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그분의 나라에서 실현되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우리를 필요로 한다”며 “우리의 헌신을 필요로 하고, 사랑으로 실천하는 믿음을 필요로 하며,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로마의 한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을 언급했다. “겨울날, 한 중년 부부, 거의 노년에 가까운 부부가 식당에서 나오는 모습이었습니다. 부인은 모피 코트를 걸치고 남편도 따뜻하게 차려입고 있었죠. 그런데 식당 문 앞에는 가난한 여인이 바닥에 누워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부는 둘 다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가난을, 타인의 필요와 고통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황은 20세기 신학자 메츠의 말을 인용해 “그리스도교 신앙이 우리 안에 ‘눈뜬 신비주의’를 일깨워야 한다”며 “이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영성 혹은 ‘눈을 감는’ 묵상에만 머무르는 영성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고통과 가난한 이들의 불행 앞에서 ‘눈을 뜨고’ 그리스도의 연민을 실천하는 믿음이 돼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일자리가 없는 이들, 먹을 것이 없는 이들,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향한 주님의 그 연민을 똑같이 느끼고 있나요?”
우리의 작은 실천으로도 현실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교황은 “우리는 세계 빈곤 문제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매일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들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생활방식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한 관심과 돌봄을 통해, 정의를 끈질기게 추구함으로써, 우리의 재물을 더 가난한 이들과 나눔으로써, 우리 주변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사회정치적 참여를 통해서 말입니다.”
제발 가난한 이들을 우리 마음에서 지워버리지 맙시다
교황은 “비록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우리의 작은 노력이 무화과나무에서 돋아나는 첫 잎사귀처럼 다가오는 여름의 전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강론을 마치며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마르티니 추기경님은 ‘먼저 교회가 있고, 그 교회는 그 자체로 이미 견고하며, 그 다음에 우리가 돌보기로 선택한 가난한 이들이 있다’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만큼 예수님의 교회가 됩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교회는 본연의 모습으로, 참된 교회로 거듭나게 됩니다. 곧, 모든 이에게 열린 집, 모든 이의 삶을 향한 하느님의 연민이 깃든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호소합니다. 각국 정부에 호소합니다. 국제기구들에 호소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호소합니다. 제발 가난한 이들을 우리 마음에서 지워버리지 맙시다.”
시리아를 위한 자선사업과 가난한 이들과의 오찬
미사에 앞서 교황은 13개의 열쇠를 축복했다. 이 열쇠들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가족’(빈첸시안 가족)의 노숙인 지원연대(FHA)가 희년을 맞아 ‘주거 취약계층 지원사업’을 통해 새 보금자리를 마련할 13개국을 상징한다. 이 국가들 가운데 시리아도 포함돼 있다. 교황청은 희년을 맞아 자선활동의 일환으로 시리아에 직접 재정을 지원하게 된다. 이 의미 있는 연대의 실천은 이탈리아 보험사 유니폴사이(UnipolSai Assicurazioni)의 아낌없는 후원으로 이뤄졌다. 유니폴사이는 희년을 앞두고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있는 시리아에 희망의 표징을 세우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교황은 미사 말미에 삼종기도를 바친 후 바오로 6세 홀로 자리를 옮겨 1300여 명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오찬을 나눴다. 교황청 애덕봉사부(별칭 교황자선소)가 주관한 이번 오찬은 이탈리아 적십자사가 후원하며, 적십자사 국립 취주악단의 연주로 더욱 뜻깊은 자리가 됐다. 오찬 후에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사제선교회가 준비한 배낭이 참석자 모두에게 전달됐다. 배낭에는 식료품과 개인위생용품이 담겨 있다.
번역 이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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