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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외계인을 찾지 맙시다”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신부가 교황궁 내 구세주의 어머니 성당에서 첫 번째 대림 특강을 시작했다. 성탄에 대한 묵상의 배경으로 삼았던 주제는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시편 42,3)라는 시편의 구절이었다.

Barbara Castelli / 번역 이창욱

“해결해야 할 일들, 맞서야 할 문제들, 대응해야 할 도전들에 의해 쫓기면서”, “우리는, 평정심과 인내심을 잃지 않고 모든 상황과 문제”에 직면하게 하는 “첫째 조건”인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우리의 관계를 뒤에 제쳐 두거나”,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말로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 라니에로 칸탈라메사(Raniero Cantalamessa) 신부는 교황궁 내 구세주의 어머니 성당(Cappella Redemptoris Mater)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석한 가운데 첫 번째 대림 특강을 시작했다. 칸탈라메사 신부의 묵상은 성탄을 향한 여정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믿음의 아침목욕”과 같은 것이 되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외계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습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확실하고 지속적인 존재인 “생명의 하느님”의 “신호들(segnali)”을 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현실적인 문제에 관한 온갖 언급”은 (잠시) 한쪽으로 밀쳐두었다. (우선) 그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다른 행성들에서 살고 있는 지성적 존재나 생명체에 대한 신호들을 찾는 데 열중한다”고 강조했다. 비록 “그것이 매우 불확실한 것”임에도, “정당한 연구”이긴 하다. 한편, 소수의 사람들만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 세상 안으로, 그 역사 안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살고 계신, 살아계신 분의 신호들을 찾고 연구하고” 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우리 가운데 계신 참으로 살아계신 분(Vivente reale)을 우리가 모시고 있지만, 우리는 그분을 부정한다”며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된 존재들, 곧 우리를 위해서는 그다지 많은 일을 할 수도 없으며, 물론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내지도 못하는 존재들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인내심은 모든 것을 얻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모든 시대와 지리적 언급을 넘어서, “우리가 그분에게 청하는 사소한 것들 너머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이 약속은 “항상 의심의 여지 없이 유지되고” 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그분을 찾는 사람은 그분을 발견할 것입니다.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열어주십니다. 일단 그분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신앙적 맥락에서” “만물/사물로 되돌아가라(Tornare alle cose)”는 체계적인 선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현실적 존재임을” 발견하면서, 그분을 향해 “두 팔 벌려” 달려가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끔찍한 이데올로기의 벽”을 “부수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살아계신 하느님 사이에는, 종이 위에 그린 하늘과 진짜 하늘 사이의 차이와 같은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얼굴을 찾을 것

칸탈라메사 신부의 묵상은 (하느님의) 존재를 주의 깊게 탐구했던 사람들의 삶과 사례들의 인용을 열거하면서 진행됐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성의 “번쩍임”이 “깨달음”으로 이끌었다. “회개한 사람들에게 있어 하느님의 존재란 완고하게 무시했거나 부정했던 이후에, 삶의 어떤 순간에, 갑자기 계시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런 일은 지난 1995년 2월 2일에 세상을 떠났던 프랑스 출신 기자였던 앙드레 프로사르(Andrè Frossard)에게 일어났다. 그는 갑자기 “(영혼의) 눈이 열려” “직감적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됐다.

윤곽이 그려진 초상화

칸탈라메사 신부는 비록 성경에 토대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적 존재를 단 하나의 정의로만 규정하려는 유혹을 경계했다.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람들이 그분의 겉모습에 관해 윤곽을 그렸던 인식의 가느다란 기호들(segni)’을 초월하는 것,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의 작은 껍질을 깨뜨리는 것, 혹은 향기가 ‘집안을 가득 채우도록’ 향수를 담아둔 ‘알라바스트로 그릇(향수보관용 손잡이 없는 설화석고 잔)’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적 존재(il divino)는 다른 모든 것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범주이고, 정의 내릴 수 없으며, 단순히 암시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로지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대조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이미지는 ‘바위’다.

“바위는 추상적인 명칭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느님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도 말해줍니다. 바위는 멀리서 바라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르기 위해서, 피난처를 찾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바위는 끌어당기고, 열정을 일으킵니다.”

하느님께서 존재하십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의 어둠과 낙담의 순간들 중 하나를 떠올리며 대림 시기 첫 번째 특강을 마무리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동료들의 초기 삶을 둘러싼 탈선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존재하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이 어떻게 (그들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지를 보았습니다.” “우리 또한 교회 안에서, 혹은 우리 삶 안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순간과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 이 단순한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을 배웁시다. ‘하느님께서 존재하시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Dio c’è e tanto basta).’”

 

07 12월 2018, 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