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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형제” 샤를 드 푸코, 성인품 오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베치우 추기경의 보고를 받고 시성성 교령을 승인했다. 이 교령에 따라 교회는 세 명의 새로운 성인과 여러 명의 복자를 얻는다. 이 가운데 순교자도 몇 명 포함돼 있다. 널리 알려진 인물은 복음적 삶과 기도의 표양인 ‘샤를 드 푸코’다.

Alessandro De Carolis / 번역 김호열 신부

한때 “방탕한 존재”라고 불려도 훗날 성인이 될 수 있다. 1858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샤를 드 푸코의 삶은 이를 철석같이 보여줬다. 그의 생애 초반 30년을 정의하는 형용사는 “향락적인” 혹은 “천박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여성의 매력에 동요하고, 젊은 시절 대부분을 차지한 군생활에 싫증을 냈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용감했고 뛰어난 장교였다. 알제리와 모로코에서 복무할 때는 훌륭한 탐험가이기도 했다. 이후 신앙의 변방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시작했던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처럼, 그는 하나의 목소리에 매료됐다. 그 목소리는 젊은 샤를 드 푸코의 기도가 됐다. “나의 하느님, 당신이 존재하신다면, 당신을 알게 해주십시오.” 

홀로 사막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에 대한 열정을 품은 이 열정적인 사람에게 당신을 알려주셨다. 샤를 드 푸코는 어느 날 이렇게 고백했다.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는 순간 저는 오로지 그분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사셨던 장소를 직접 손으로 만지고 싶어서 이스라엘 성지로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들어가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자신의 새로운 수도회를 만들고 싶은 소망을 품고 있었다. 사제품을 받은 샤를 드 푸코는 사하라 사막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은수처를 마련했다. 이제 그의 새로운 수도복은 하얀색이 됐다. 수도복의 가슴 부분에는 붉은 심장 모양의 천을, 심장 위에는 십자가를 붙였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이 누구든지, 곧 그리스도인이든, 무슬림이든, 유다인이든, 무신론자이든 상관하지 않고 반갑게 맞아들였다. 

작은 가족

그는 알제리 타만라세트의 투아렉 마을에서 13년을 더 보냈다. 하루에 11시간 기도했으며, 성체의 신비에 빠져들었다. 그는 방대한 프랑스-투아렉어(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현지 언어) 사전도 편찬했다. 1916년 12월 1일, 그의 죽음은 극적이었다. 모든 모임에 항상 열려 있던 그의 은둔지는 강도들이 약탈했다. “예수의 샤를”로 알려진 샤를 드 푸코는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보물”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그 보물이란 사실 감실 안에 모셔진 그리스도였다. 그의 사후 그의 성덕의 명성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오늘날 샤를 드 푸코의 영적 가족은 비록 그가 생전에 설립하지는 않았지만, “보편적 형제”에게서 영향을 받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여러 평신도 단체들과 수도회 공동체들, 평신도 혹은 사제 세속회가 있다. 

새 복자들

이번 교령은 샤를 드 푸코를 비롯해 △‘교리교육사제회(Doctrinaires)’ 창설자인 프랑스 출신 복자 세자르 드 뷔스(César de Bus, 1544-1607) 신부 △이탈리아 출신 복녀 마리아 도메니카 만토바니(María Domenica Mantovani, 1862-1934) 수녀 등 총 3인이 성인품으로 오르는 데 필요한 기적심사가 승인됐음을 확인하고 있다. 아울러 ‘콜럼버스 기사단’ 설립자인 가경자 마이클 맥기브니(Michele McGivney, 1852-1890) 신부 △’교황청 전교회’ 설립자 겸 ‘생활한 매괴회’ 설립자인 가경자 폴린느-마리 자리코(Pauline-Maria Jaricot, 1799-1862) 등 이들의 중재로 기적이 발생했음을 승인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아울러 시성성이 발표한 이번 교령에 따라 △1799년 5월 13-16일 카사마리에서 피살된 카사마리의 시토회 수사들인 시메온 카르돈(Simèon Cardon)과 동료 순교자 5인 △엘살바도르 산 후안 노누알코에서 피살된 이탈리아 출신 순교자 코스마 스페소토(Cosma Spessotto, 1923-1980) 작은 형제회 사제는 순교를 인정받아 복자품에 오른다.

마지막으로 교령은 1813년 프랑스 카스텔노나리에서 태어나 1859년 시에라리온 프리타운에서 선종한 ‘하느님의 종’ 멜키오레 마리 드 마리온 브레질락 (Melchior-Marie de Marion Brésillac) 주교의 영웅적 덕행들을 승인했다. 그는 인도 코임바토르교구 교구장 서리를 역임했으며, 아프리카 선교회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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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5월 2020,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