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사순 특강 “그리스도께 믿음을 두는 사람은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OSSERVATORE ROMANO / 번역 이재협 신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그림 〈절규〉처럼 우리가 절망에 빠져 소리 지를 때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주변의 모든 것에 무심한 듯 보이는 두 사람을 지나 다리 위를 달리면서, 두 손을 입 주변에 가져다 대고 절규를 내뱉는다. ‘인생의 의미가 없다’는 확신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현대 미술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를 통해 비극적이게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위험에서 우리는 빠져나와야 한다. 교황청 강론 전담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3월 12일 금요일 오전, 바오로 6세 홀에서 이라크에 다녀온 프란치스코 교황과 교황청 관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세 번째 사순 특강을 진행했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이러한 위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늘 경계하라고 조언했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세상에 아주 넓게 퍼진 경향, 곧 “마치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교회, 혹은 그리스도를 빼고 교회의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있을 듯한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경향에 대응하면서 (인생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세상과 세상의 의사소통 수단의 오류를 지적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강화함으로써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마태오 복음 16장 15절에 대한 묵상으로 특강을 진행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기 위해 우리는 가장 확실한 길인 교의(dogma)의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시고, 참 하느님이시며, 하나의 인격을 지니신 분”이라고 초대 교회부터 가르쳐 왔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사실 이 가르침은 모든 교의를 일깨우고 생명을 불어넣는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주 사순 특강에서는 참 인간이신 예수님에 관한 교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번 특강에서는 “참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교의를 이야기할 것”이라며 특강을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은 교회의 탄생과 함께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믿음은 어떠합니까?”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역사적 변천의 여러 순간을 빠짐없이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정리해 말했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의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대하게 선포됐으며, 우리는 그 믿음을 신경으로 반복합니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사상의 영향이 “그리스도교를 그의 신성에서 분리해 숭고한 도덕적 이상 정도로 축소시켜 버렸으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역사적 존재를 부정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을 다시금 일깨울 긴급성”이 요구된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4복음서가 전하고, 특히 요한 복음이 제안하는 체험에서 출발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너는 나를 믿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어떤 이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즉시 ‘네. 당연히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와 비슷한 질문이 심지어 믿음을 지닌 한 사람에게, 한 사제에게 혹은 한 주교에게 던져진다는 사실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아마도 아직 진실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의 고백에 이르기 전에 마주하는 거대한 이성의 방해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가장 높은 봉우리, 곧 신앙의 에베레스트와 같습니다.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각자가 원하는 대로 상상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멀리 있는 하느님을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우리 믿는 이들, 교회 내 사람들에게서 거짓 설득을 없애고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짓 설득이란, 비록 우리가 조금 더 사랑을 실천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라도, 믿음에 있어서는 나름 괜찮지 않느냐는 자기 합리화입니다. 잠시만이라도,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보여주고자 하지 않으면서, 신앙을 내면화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근원을 재발견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기 위한 상태를 다시 마련해야 합니다. 니케아 공의회의 교의가 나온 믿음의 비약적 성장을 재현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니케아 공의회 신경을 반복하여 되뇌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 수세기 동안 동일한 적이 없었고,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 간직했던 믿음의 비약적 성장을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미래에 복음을 선포할 교역자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보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선서가 아니라 솔직하고 형제적인 식별을 통해 확인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강조한 내용들은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에 대한 의미 있는 전망을 보여준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먼저 근본주의 혹은 무절제한 주관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리스도교의 참된 ‘영적 일치 운동’은 단지 그리스도인의 일치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같은 체험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교 영적 일치 운동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성인들의 친교’를 이뤄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가끔 고통스럽게도 같은 성사적 표징을 공유하는 ‘성사의 친교’와는 상응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건물의 모퉁이 돌은 그리스도의 신성입니다. 이것이 빠지면 그 건물은 무너져 내립니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특강을 끝맺으며 “코로나19 대유행 시대에 더 많은 이들이 관심을 두는 생명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까지 만드는 거대한 유혹에 저항할 힘을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으며, 그 누군가가 그에게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다면 실생활에서 응용할 수 있는 단순한 조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주일미사 때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의식적으로 반복해 신경을 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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