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다른 이들을 비추는 빛이 돼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24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노년에 대한 교리 교육 여정을 마무리했다. 노년에 대한 18번째 교리 교육은 동정 마리아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다시 연결시키고 우리의 운명을 예고하는 성모 승천에 관한 묵상에 초점을 맞췄다. 부활한 육신의 삶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누렸던 것보다 100배, 1000배 더 활기찰 것이다.

번역 이창욱

노년에 대한 교리 교육  18. 창조의 산고: 피조물의 역사, 잉태의 신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얼마 전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이 신비는 마리아의 운명을 빚어낸 은총의 성취를 비추고, 또한 우리의 목적지도 비춰줍니다. 목적지는 하늘입니다. 하늘로 불려 올라가신 동정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저는 노년에 관한 교리 교육의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서방 교회는 성모 승천을 영광스러운 빛에 싸여 들어올려지신 모습으로 묵상합니다. 동방 교회는 기도하는 사도들에게 둘러싸인 성모님께서 누워 주무시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그런 성모님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기를 안듯 두 손으로 안아 하늘로 데려가시는 모습으로 묵상합니다.

신학은 이렇듯 성모님의 죽음과 관련한 이 예외적인 “승천” 사건을 항상 성찰해 왔습니다. 교의(믿을 교리)는 성모님께서 돌아가셨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신비를, 우리 모두에게 생명에 이르는 세대를 위한 길을 열어주신 성자의 부활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다시 만나게 하는 신적 행위는 죽을 인간의 육신의 부패라는 일반적인 현상을 단순히 초월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을 모신 육신의 승천을 예고합니다. 따라서 승천 사건을 통해 우리와 관련된 부활의 운명이 예고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의 맏이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가장 먼저 가신 분, 모든 이보다 먼저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 우리도 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곧,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신 바에 따라 우리는 부활이 두 번째 태어남과 다소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요한 3,3-8 참조). 첫 번째 태어남이 지상에서의 탄생이었다면, 두 번째 태어남은 하늘에서의 탄생입니다. 일반알현을 시작할 때 봉독된 성경 본문에서 사도 바오로가 출산의 고통(로마 8,22 참조)에 대해 말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인간이 모태에서 나온 뒤에도 항상 같은 인간인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 이후에 하느님의 공간인 하늘나라에서 태어나는 우리도 지상 여정을 걸어온 바로 그 우리 자신과 동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일도 이와 유사합니다. 곧, 부활하신 분은 여전히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인성, 당신의 경험, 심지어 당신의 몸성(corporeità)도 잃지 않으십니다. 그렇고 말고요. 그러한 것이 없다면 그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일 수 없고, 더 이상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분의 인성, 그분의 생생한 경험을 고스란히 간직하십니다. 

부활 후 40일 동안 나타나신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의 체험이 이를 말해줍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희생이 아로새겨진 상처를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그 상처는 더 이상 고통스럽게 당한 치욕의 추함이 아니라, 이제는 마지막까지 충실히 머무신 당신 사랑의 지울 수 없는 증거입니다. 당신의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친밀함 속에 살고 계십니다! 또한 그 안에서 그분께서는 기억을 잃지 않으시고, 살아온 역사를 저버리지 않으시며, 지상에서 맺었던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벗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가셨고, 자리를 마련하신 다음에 오실 것입니다. 오로지 마지막 날에 모든 이를 위해 오시는 것만이 아니라, 매순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안에 모으시려고 우리를 찾아 오실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나를 그분께 데려가길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일종의 발걸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세상에 살고 계십니다. 거기에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있고, 새 땅이 마련돼 있으며, 인간의 마지막 거처인 천상 성읍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썩어 없어질 우리 육신의 변화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이 우리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하고 우리가 하느님의 천상에서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게 해 주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육신은 우리가 직접 경험할 끝없는 모험, 하느님 창조행위의 무한하고 복된 활기에 숭고한 감정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해 말씀하실 때에는 혼인잔치로 묘사하십니다. 곧,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잔치, 집을 온전하게 만드는 일, 씨를 뿌린 것보다 더 많이 수확한다는 놀라움에 비유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우리의 감성은 하느님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사랑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우리 인생의 유례없는 목적지와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사랑하는 동년배 여러분 – 저는 우리 “노인들”에게 말씀드립니다 – , 우리의 노년에는 어루만짐, 미소, 몸짓, 감사하는 노력, 예기치 못한 놀라움, 기쁘게 맞이하는 일, 충실한 유대 등 인생을 구성하는 수많은 “섬세한 행동”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이별의 순간이 가까워지면서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인생의 본질이 분명해집니다. 생각해 봅시다. 노년의 지혜는 우리 잉태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어린이, 청년, 성인,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삶을 비춰줍니다. 우리 “노인들”은 다른 이들을 위해 이런 자리가 돼야 합니다. 곧, 다른 이들을 위한 빛 말입니다. 우리 일생은 전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땅에 묻혀야 할 씨앗처럼 보입니다. 그 씨앗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태어날 것입니다. 진통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근심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태어날 것입니다(요한 16,21-23 참조). 부활한 육신의 삶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누렸던 것보다 100배, 1000배 더 활기찰 것입니다(마르 10,28-31 참조).

부활하신 주님께서 호수 건너편에서 사도들을 기다리시는 동안 물고기를 구워(요한 21,9 참조) 그들에게 내어주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배려 넘치는 이 사랑의 행동은 우리가 다른 강가로 건너갈 때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특히 노인 여러분, 인생 최고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늙은이인데, 무엇이 더 와야 한다는 말인가요?” 인생 최고의 때입니다. 인생 최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이 삶의 충만함을 바라도록 합시다. 우리보다 앞서 하늘로 가신 주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해 주시길 빕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은 수동적인 기다림, 지루한 기다림이 아니라 두렵고 떨린 마음을 품은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주님께서 언제 오실까? 나는 언제 거기에 갈 수 있을까?” 이 건너감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모르고 저 문을 통과하는 것이 다소 두렵지만, 우리를 앞에서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이 항상 있기에 문을 통과하면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노인” 여러분, 동년배 여러분, 명심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단 통과하면, 그 다음에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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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8월 202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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